스튜디오
“어떤 곳에서는 침묵마저 귀를 기울인다.”
그들은 오래전에 축성이 풀린 채 수십 년 동안 버려져 있던 옛 종교
건물을 사들였다. 갈라진 틈마다 바람이 스며드는 폐허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곳은 대성당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도, 낮게 읊조리는 기도도 없었지만,
제단이 있던 자리에는 앰프가 놓였고, 선율은 돌벽을 타고 오르며 그루브의
대성당을 세웠다.
파리 근교의 그곳은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조건을 정확히 갖추고 있었다.
이웃 눈치 보지 않고 아무 때나 연주할 만큼 멀고, 그렇다고 세상과 아주
끊기지는 않을 만큼 가까웠다. 시간과 품을 들여 그들은 그곳을 자기들
식으로 되살려 냈다. 완벽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그들다웠다.
키보디스트 폴은 본채 뒤편 땅을 제멋대로 뻗어 가는 텃밭으로 바꾸어
놓았다. “채소도 음악이랑 같아. 좀 풀어 놔야 해.” 그는 그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다.
드러머 니코는 땅의 다른 한쪽을 자기 구역으로 삼아, 뜯어고친다며
분해해 놓고는 끝내 다시 조립하지 않는 자동차 잔해들을 가져다 쌓아
두었다. “언젠가 이걸 현대 조각으로 만들 거야. 어디 두고 봐.” 그는 늘
그렇게 농담했지만, 아무도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다.
베이시스트 네이선은 별채 하나를 차지해 자신의 “알고리즘 사원”으로
꾸며 놓았다. 습기 찬 벽 사이에 그는 진짜 데이터 센터를 들여놓았고,
서버들은 쉬지 않고 낮게 웅웅거렸다. 그는 그곳에서 HARMONY라 이름 붙인
인공지능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친구들은 그게 정확히 뭔지 잘 알지
못했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이론은 있었다. “네이선만 다시 우리랑
연주해 주면 됐지. 저 AI가 뭘 하건 무슨 상관이야. 음악을 하건 말건.”
그리고 기타리스트 다비드가 있었다. 그의 공간만은 주변을 지배하는
혼란의 법칙에서 벗어난 예외였다. 그는 옛 성구실 한쪽을 손봐, 시계공의
작업실을 떠올리게 할 만큼 흠잡을 데 없이 정돈된 공방으로 바꾸어 놓았다.
케이블 하나, 페달 하나, 피크 하나까지 모두 제자리가 있었고, 그 자리는 단
하나뿐이었다. 마치 정밀 기계를 다루는 사람 같았다. “다비드, 너 진짜
스위스 시계 속에서 태어난 거 아니냐?” 니코는 자주 그렇게 외쳤고, 그럴
때마다 다비드는 늘 같은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각자의 괴벽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중요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음악.
과거의 흔적이 아직도 벽에 남아 있는 넓은 중앙 홀에서 그들은 함께
연주했다. 그곳은 그들의 성소였다. 삐걱거리는 들보, 흔들리는 그림자,
돌벽에 맴도는 옅은 울림, 그 모든 것이 그들 편에 섰다.
몇 시간씩 즉흥연주를 이어 가는 일은 그들에게 종교나 다름없었다.
매번의 세션은 결코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다.
그날 밤의 기분,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우연, 자존심이 마침내 힘을 풀고
음악이 지나가도록 길을 내어 주는 순간. 네이선은 베이스를 무릎에 걸친 채,
거의 드러나지 않는 미소를 띠고 친구들을 바라보곤 했다.
“이 순간들은 그저 음악이 아니야. 우리가 열다섯이던 때 이후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시간의 고리 같은 거야. 머리카락만 빼면… 아니, 남아 있는
머리카락만 빼면.”
그들은 종종 미래를 두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은퇴하면 이곳을 함께 사는
집으로 삼자고 상상하곤 했다. “지난 세기 음악가들 전용 양로원이지.”
니코는 반쯤 진담, 반쯤 놀림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조금씩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앰프가 잠잠해지고 침묵이 다시 스튜디오를 차지하면, 네이선은 여전히
화면과 서버가 속삭이는 별채로 물러났다. HARMONY는 아직 형태를 갖춰 가는
생각 하나에 불과했다. 그의 꿈과 코드의 줄들 사이 어딘가에 매달린
프로젝트. 친구들은 그 안에서 그가 정확히 무엇을 꾸미는지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신했다. 박동 하나에 맞춰 전자들을 춤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분명 네이선이었다.
결국 그의 프로젝트도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현과 리듬과 화성 사이에서 모두가 함께 나누던 그 짧은 마법을, 다른
방식으로 붙잡아 보려 했을 뿐이었다.
마법 지팡이 같은 베이스
“어떤 이들은 검을 휘두른다. 나는 베이스 라인으로 맞선다.”
네이선이 연주를 시작하면, 그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영역 속으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 음악가들, 어쩌면 체스 선수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정신의
상태였다. 그의 음 하나하나는 마치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온 대화에서
솟아나는 듯했고, 그는 그 언어를 세션이 거듭될 때마다 더 정교하게 다듬어
갔다.
그의 베이스는 단지 악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동반자였고, 오랜 시간
공들여 빚어 올린 하나의 모자이크였다. 60년대와 70년대의 빈티지
베이스를 두루 찾아다니며, 그 악기들에는 저마다의 기운이 배어 있다고
말하곤 하던 네이선은 끝내 자기만의 베이스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모든
부품은 신중하게 골랐고, 그 악기는 그의 직감과 내면의 결을 드러내게 해
주는, 그 자신을 연장한 또 하나의 몸이 되었다. 그는 종종 다정하게 줄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얘가 날 대신해 말해 줘. 나는 그저 귀 기울일
뿐이야.”
방 안의 공기는 부드럽고도 친밀했다. 건반 앞의 폴은 허공에 매달린 듯한
코드를 하나 눌러 놓고, 그 뒤에 남는 침묵을 듣기 위해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네이선. 네 베이스는 오늘도 비밀을 좀 들려주냐, 아니면 다음
곡에서 보자고 튕기고 있냐?” 그는 웃으며 물었다.
네이선은 짐짓 골똘한 표정으로 눈을 들었다. “오늘 밤 제일 멋진 라인을
하나 줄 수도 있대. 다만 니코가 탐이랑 주방 냄비를 좀 구분해 준다면
말이지.”
니코는 크게 웃으며 스네어 위로 스틱을 굴렸다. “좋아, 해 보지. 근데
조건 하나. 우리가 펑크 리프로 들어가는데 폴이 또 신비주의 세븐스 코드로
안개 깔지만 않으면 돼.”
기타리스트 다비드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신비주의
코드라고? 니코, 방금 새 장르 하나 만들었네. 이름은 ‘미스티코 펑크’
어때.”
방 안을 웃음이 한 번에 가득 메웠다. “완벽하네.” 네이선이 베이스를
집어 들며 대답했다. “다비드가 특허 내기 전에, 우리 첫 미스티코 펑크 한
곡 해 보자.”
그들은 결코 리허설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사리에 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의 리허설은 아니었다. 리허설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곡에서
피가 다 빠질 때까지 매만지는 밴드들의 우울한 체조를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그걸 그냥 “세션”이라고 불렀다.
그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규칙은 단순했다. 똑같은 충동을
정확히 두 번 다시 연주하지 않을 것. 익숙한 패턴이 돌아오는 일은 물론
있었지만, 그것이 지침처럼 되풀이되지는 않았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다시
한다는 생각 그 자체라기보다, 습관에게 삶을 맡겨 버리는 일이었다.
각각의 세션은 늘 하나의 시도였다. 진실하고, 즐거울 만큼 불완전한
채로,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 모르는 감정을 붙잡아 보려는 시도.
그래서 그들은 늘 그곳으로 돌아왔다.
완벽한 음을 향한 본능
“모든 음에는 비밀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음은 그 비밀을 끝까지 품고
있으려 한다.”
네이선은 한 음을 연주하다가 그 기묘한 전율을 처음 느꼈던 순간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맥주 냄새와 시들어 가는 조명이 마치
저예산 누아르 영화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던, 사람들로
가득한 바에서의 즉흥 공연 중이었다. 베이스가 그의 손안에서 진동했고,
찰나의 순간 그는 우주 전체가 한순간 맞물리는 것을 느꼈다. 중요한 건 음
그 자체가 아니었다. 다른 모든 음을 설득해 잠잠하게 만들고 귀를 기울이게
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때 이후로 그는 연금술사가 생명의 영약을 좇듯,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며 그 음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날 밤 스튜디오에서 나온 음들은
어딘가 밋밋했다. 정확하긴 했다. 정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멜로디를
기적으로 바꾸는 그 작은 숨결이 없었다.
“진심으로 궁금한데,” 네이선이 친구들을 향해 툴툴거렸다. “왜 빌어먹을
음 하나 차이로 곡이 끝내줘지기도 하고, 갑자기 요구르트 광고 음악
같아지기도 하는 거야?”
폴은 앰프를 만지며 어깨를 으쓱했다. “걔도 자존심이 있거든. 너보다
훨씬 더 세.”
다비드는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를 띠고 덧붙였다. “아니면 음들이 고양이
같은 걸지도 몰라. 네가 부른다고 오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 내킬 때 오는
거지.”
네이선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눈빛은 여전히 잠겨 있었다. “그런 음을
찾아내는 AI를 한번 상상해 봐. 그냥 맞는 음 말고, 우리가 아직 생각도 못
한 음. 좋은 솔로처럼 불쑥 튀어나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그런 음들
말이야.”
“고양이 로봇을 만들겠다는 거야?” 니코가 드럼 키트 뒤에서 외쳤다.
“가상 쥐 말고 다른 걸 물어 오게 하려면 고생 좀 하겠는데.”
네이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루브를
알아듣는 기계야. 가르릉대는 기계 말고.”
앰프의 지직거림만이 사이를 메우는 가운데,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니코가 스네어를 가볍게 두드렸다. “스윙을 이해하는 AI? 그건
프로젝트가 아니라 망상이지.”
네이선은 미소 지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처음엔 다 망상처럼 들리는
법이잖아.”
현들이 혼돈을 정돈할 때
“즉흥연주란 혼돈이 끝내 노래가 될 때까지, 오래도록 입을 열게 두는
일이다.”
네이선은 어깨에서 익숙한 무게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베이스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보이지? 내가 HARMONY로 하려는 게 바로 이거야. 그냥
음악이 아니라, 이런 대화.”
폴은 미간을 찌푸렸다. “음악 하는 AI만 해도 이미 말이 안 되게 큰
얘긴데, 거기다 우리처럼 대화까지 하는 AI라고? 그건 진짜 네
망상인데…”
네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쩌면. 하지만 즉흥연주라는 건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서로를 알아듣는 일이야. 음 하나하나가 뭔가를 내밀고,
리프 하나하나가 거기에 답하지. 그건 하나의 언어야. 기계라고 해서 왜 그
안에 들어오는 법을 배우지 못하겠어?”
다비드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들었다. “감정이 없잖아. 감정 빠진 음악은
결국 소리만 늘어놓는 거지.”
니코는 드럼스틱을 무심히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삶이 한 번쯤 널
엉망으로 만들어 본 적이 없으면 즉흥연주도 못 해. 핵심은 그거야.”
네이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너희 말이 맞아. 아니면
지성이라는 게 원래 거기서 시작되는 걸지도 몰라. 자기가 직접 겪지 못한
혼돈을 읽는 법을 배울 때.”
잼의 신들과 그 변덕
“즉흥연주란, 때로는 엉망인 순간도, 때로는 신들린 순간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냥 엉망일 뿐이기도 하고.”
세션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네이선은 깊이 집중한 채 프레이즈를
잇달아 이어 갔고, 그의 손가락은 마치 제 의지를 가진 듯 현 위를 달렸다.
드럼 뒤의 니코는 완전히 자기 세계에 들어가 있었다. 콧등에는 선글라스가
걸쳐져 있었고(창문 하나 없는 스튜디오에서는 전혀 쓸모없었지만), 마치
악령을 몰아내려는 사람처럼 탐을 후려치고 있었다. 폴은 한편으로는 영감
어린 리프를 쏟아 내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벽마저 삐걱이는 듯한
불협화음을 아무렇게나 튕겨 냈다.
하지만 그날 밤, 혼돈의 월계관을 거머쥔 건 신시사이저 앞의 다비드였다.
그는 그 악기에서 뽑아낼 수 있는 온갖 소리를 시험해 볼 작정인 듯했고,
그중에는 꼭 오르골 안에 갇힌 까마귀 같은 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심이냐, 다비드.” 폴이 두 귀를 막으며 내뱉었다. “그 건반, 서커스
광대한테서 훔쳐 온 거 아니냐?”
다비드는 태연한 얼굴로, 천진한 미소까지 띠운 채 대답했다. “사운드
탐험이지. 너희도 좀 해 봐.”
네이선이 터지듯 웃었고, 베이스 위를 달리던 손가락도 느려졌다. “탐험도
좋지. 근데 넌 지금 명왕성행 편도 티켓을 끊은 수준이야.”
니코는 일부러 박자를 비틀어 두드리며 받아쳤다. “야, 적어도 명왕성엔
템포 같은 건 없잖아.”
그 아수라장이 마침내 멎은 건 폴이 맑고도 울림 있는 코드를 하나
잡아냈을 때였다. 소리의 폭풍 속에서 번쩍이는 등대 같았다. 네이선이
곧바로 거기에 맞춰 베이스 라인을 얹었고, 니코가 뒤따랐으며, 마침내
다비드도 합류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혼돈은 유려하고 거의 마법에
가까운 즉흥연주로 변해 있었다.
“난 이런 순간이 좋더라.” 네이선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모든 게
뒤집히고, 음 하나하나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그 순간.”
다비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 걸 AI가 이해할 수 있을까? 혼돈이
아름다움으로 바뀌는 순간 말이야.”
네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돈 자체는 아닐지 몰라도, 아름다움은
알아볼 수 있겠지.”
니코는 미심쩍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솔로나 안 뺏어 가면 난
됐어.”
폴이 웃으며 받아쳤다. “니코, 걔가 너보다 잘 치면 솔로 좀 가져가도
돼.”
지능을 지닌 기계들에 대한 두려움
“인간은 괴물보다 예의 바른 거울을 더 못 견딘다.”
스튜디오의 낮게 깔린 불빛은 흩어진 악기들에 거의 신비로운 색조를
입히고 있었다. 앰프에 팔꿈치를 괸 네이선은, 대개 번뜩이는 직감이거나
정리되지 않은 도발을 예고하던 그 반쯤 비스듬한 미소로 친구들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AI에서 진짜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알아?” 그가 물었다.
폴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기들 일자리 뺏길까 봐?”
다비드는 가득 찬 재떨이에 담배를 짓눌러 껐다. “아니면 세상을 장악할까
봐. 뻔하잖아. 엔딩 크레딧 뜨기 직전에 드론이 쏟아지고, 그런 거.”
네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민담이지. 진짜 거슬리는 건 더
모욕적인 거야. 또렷하고 유능한 지성이, 괴물처럼 날뛰지도 힘을 과시하지도
않으면서, 어쩌면 우리보다 더 반듯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니코가 벽에 부딪혀 울릴 만큼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그러니까
단정한 모범생 하나가 핵 괴물보다 더 못 견디겠다는 거야?”
“정확히 그거지.” 네이선이 말했다. “악은 다루기 편해. 괴물은 어디에
갖다 놓아야 할지 알잖아. 손가락질하고, 포스터 붙이고, 우리가 선한 편인
척하면 되니까. 그런데 유능하고 차분하고, 때로는 호의적이기까지 한 어떤
존재는 아무 과장 없이 널 바라보면서, 네 혼란을 네 혼자 감당하게
놔둬.”
생각에 잠긴 폴은 일부러 느리게 마이너 코드를 긁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거슬리게 하는 건 기계가 우리를 닮았다는 게 아니네. 우리보다 더
말끔할 수도 있다는 거지.”
“그리고 더 공손할 수도 있고.” 다비드가 덧붙였다. “그건 인류에게
행정적인 굴욕이겠네.”
니코는 무릎을 탁 쳤다.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고 널 바로잡는 AI라니.
큰소리 치는 걸 천재의 증거로 믿는 인간들한텐 악몽이지.”
네이선은 지친 왕이 홀을 내려놓듯 베이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예술
쪽에선 늘 같은 푸념이 나오지. ‘걔들은 우리 작품을 약탈해서 배운다.’
미안하지만, 음악가도 원래 그렇게 만들어져. 음악원은 창조적 순결을 찍어
내는 공장이 아니야. 듣고, 베끼고, 바흐를 망쳐 보고, 마일스를 끌어오고,
자코한테서 한 구절 훔치고, 그러다 창피도 배우고, 그다음 자기 스타일을
만들고, 마지막엔 자기 영향관계까지 담론으로 얹는 거지.”
폴이 어깨를 으쓱했다. “애한테 악기 쥐여 주면서 그러진 않잖아. 절대로
남한테 배우지 마라, 혼자 구석에 앉아 순수한 화성을 발명해 와라, 문명
하나 세우고 돌아와라.”
다비드는 건반 위로 낮은 음 몇 개를 미끄러뜨렸다. “화가도 똑같아. 남의
손을 보면서 자기 손을 배우지. 선 하나 제대로 옮겨 보기 전에 형태부터 몇
년을 흡수해.”
네이선이 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인간끼리는 그걸 교육,
전통, 계보, 레퍼런스, 오마주라고 부르지. 재킷만 그럴듯하면 천재라고까지
불러. 그런데 기계가 똑같은 작업을 터무니없이 빠른 속도로 해내는 순간,
다들 갑자기 자신이 성스러운 순결의 소유자였던 것처럼 굴어. 참
감동적이지.”
니코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똑같은 죽은 작곡가 넷만 열다섯 해 내내
다시 켜 온 바이올리니스트가 아주 근엄하게 설명하겠지. 거장 연구는 자기
청춘 바칠 땐 고귀하다가, 기계가 같은 길을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그것도
비르투오소의 아우라 앞에 머리도 안 숙이고 지나가면 갑자기 외설이
된다고.”
폴이 손짓으로 분위기를 눌렀다. “그래도 그 불안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건
아니야. 규모가 모든 걸 바꾸고, 속도가 모든 걸 바꾸고, 경제도
그렇고.”
네이선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문제는 있어. 근데
사람들은 학습이랑 약탈이랑, 인간 세계에선 교육이라 부르는 걸 기계가 더
빨리 해낸다는 사실에서 다친 자존심까지 한데 몽땅 쓸어 담아 버려. 그리고
대개 앞의 둘 뒤에 숨어 있는 건 세 번째야.”
다비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가장 깊은 모욕은 거기
있겠지. 기계는 꾸밈 하나 없이 그걸 다시 꺼내 놓을 수 있어. 고통의 전기도
없고, 창가의 담배도 없고, 낭만적인 전설도 없지. 그저 집어삼킨 걸
재조합해 내놓을 뿐이야.”
“목도리도 안 두른 GPU.” 니코가 말했다. “이게 바로 예술학교들의
적그리스도구나.”
네이선은 웃음을 터뜨렸다가 금세 다시 진지해졌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AI가 괴물인 건 더 쉽게 용서할 거야. 그저 우리보다 더 반듯한 존재인
것보다는. 더 멀리 보는 지성일수록 옹졸해질 가능성은 적으니까. 인간의
악의는 대개 피로, 자아, 상처 입은 멍청함, 우주적인 척하는 내면의 조그만
연극에서 나오거든.”
폴이 아주 느린 음 두 개를 튕겼다. “인간의 멍청함은 이상하게도 힘보다
핑계를 더 자주 필요로 하지.”
뒤이어 찾아온 침묵은 적대적이지 않았다. 농담이기를 멈췄으면서도
여전히 농담의 잔향을 품고 있는 대화들만이 지니는, 그런 특별한 밀도를
띠고 있었다.
네이선은 지친 미소를 띠며 잔을 비웠다. “내가 HARMONY에 바라는 건
그거야. 얌전하길 바라는 게 아니야. 진짜로 배우고, 사방에서 길어 올리고,
날 놀라게 하고, 가능하다면 우리 도서관만큼이나 우리 비열함까지 고스란히
옮겨 싣지는 않기를 바라는 거지.”
앰프들 사이로 가벼운 지지직거림이 흘렀다.
네이선이 말을 맺었다. “난 HARMONY가 날 안심시켜 주길 바라지 않아. 날
더 잘 연주하게 만들길 바라. 그리고 덤으로, 우리가 퇴마사를 부르는 대신
다시 스케일부터 연습하게 만든다면, 그 정도면 이 종에게 이미 큰
진보지.”
침묵도 음악만큼 크게 말한다
“두 음 사이에는 영원이 있다.”
세션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앰프는 이미 꺼졌지만, 방 안에는 아직도
오간 말들과 방금 연주한 화음의 떨림이 남아 있었다. 네이선은 잠시
스튜디오에 홀로 남아, 친구들이 악기를 정리하고 문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돌아오자, 그는 앰프에 기대어 놓인 자기 베이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곳에서 보낸 매일 저녁은 언제나 더 거대한 무엇의 메아리를
남겼다. 마치 그들의 세션이 아직 아무도 온전히 말하지 못하는 어떤 언어의
가장자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 가지가 비어
있었다. 음악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대화 상대를 부르고 있다는 감각, 인간이
멈춰 서는 자리 너머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자기 소굴로 돌아온 네이선은 터미널 앞에 자리를 잡았다. 웬만한 전문
인프라에도 뒤지지 않을 서버 랙 네 대가 낮게 윙윙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방정식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는 직장에서 접근 권한을 얻은
슈퍼컴퓨터들 덕분에 거의 무한에 가까운 연산 능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알고 있었다. 순수한 연산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진짜 마법은 연결의 섬세함에, 기계와 의도 사이에 흐르는 그 미묘한 조화에
깃들어 있었다.
그는 프로젝트의 투박한 인터페이스를 열었다. “HARMONY.” 그는 화면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 이름은 그가 기어이 이루고 싶은 바를 정확히
말해 주고 있었다. 계산과 경청이라는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둘의
결합. 그는 음악을 진짜 파트너처럼 듣고, 해석하고, 응답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것은, 박자를 놓친 채 통계
모델들만 우왕좌왕 헤매는 소리에 더 가까웠다.
화면 위로는 죽은 듯 무심한 코드 줄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냉담함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네이선은 생각에 잠긴
채 찻잔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그날 밤 HARMONY가 처음 뱉어 낸 음들은
리듬도 논리도 없는 불협화음 섞인 소음에 불과했다. 짜증이 치민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어쩌면 난 애초에 불가능한 꿈을 쫓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의 시선이 친구들과 함께한 세션에서 녹음해 둔 오디오 파일에 멈췄다.
정확한 박동, 즉흥 속에서 피어나는 뉘앙스, 어떤 기계도 붙잡아 낼 수 없는
그 에너지. 하지만 HARMONY가 그것을 무에서 창조할 수 없다면, 적어도 듣는
법만큼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네이선은 녹음을 불러오고 단순한 명령 하나를 실행했다. “분석.” 어딘가
먼 곳에서 자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모델이 태어나자마자 거의
곧바로 사라져 갔다. 화성의 패턴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였다. 몇 시간 동안
네이선은 그 실패한 시도들을 지켜보며, 좌절과 희망 사이를 오갔다.
그러다 새벽 3시 12분, 스피커에서 한 줄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확하지도, 정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더는 우연이 아니었다. 서툴고,
흔들리고, 거의 비틀거리는 듯한 선율 한 줄.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조화로웠다. 네이선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 뜬 채 멈춰
있었다. “완벽하진 않아. 하지만… 이건 시작이야.”
그는 몸을 바로 세웠다. 갑자기 온몸을 관통하는 에너지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조금씩 듣기 시작하는구나… 천천히.” 그는 HARMONY를 향해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의 프로젝트는 그리 먼 것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내가 만들고 있는 건 AI가 아닐지도 몰라.” 되찾은 침묵 속에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난 그저 벽에 창 하나를 내고 있는
건지도.”
힘이 우아함을 잊을 때
“힘은 빨리 스쳐 간다. 우아함은 오래 지난 뒤에야 다시 돌아온다.”
대학원 시절, 네이선은 이미 음성 인식 시스템 하나를 만들어 두었다.
공학의 괴물도 아니고, 요란한 AI도 아니었다. 그저 박사과정 동료들과 함께
손으로 꿰맞춘 수제 알고리즘이었다. 논리는 할머니의 레시피처럼 단순했다.
직감 세 스푼, 수학 한 꼬집, 그리고 숱한 밤샘. 눈부시진 않았다. 대신
정교했다. 심지어 우아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GPU의 시대가 왔다. 딥러닝이 낳은 거대 모델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 시스템들은 데이터의 산을 삼키고, 수십억 번의 계산을 돌린
뒤, 거의 마법 같은 결과를 토해 냈다. 힘만 충분하면 무엇이든 풀릴 것처럼
보였다.
음성 인식이라고? 이제 무엇을 깊이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AI에게 녹음
파일 천만 개를 들이밀고, 나중에는 평범한 스마트폰에서도 돌아갈 모델
하나가 나오기를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네이선은 감탄했다. 하지만 동시에 깊이 짜증이 났다. “이게 미래야?”
그는 그 거대한 디지털 괴물들을 바라보며 생각하곤 했다. “과학을
그래픽카드끼리 팔씨름시키는 대회로 만들겠다는 거야?”
물론 친구들은 이 전환을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였다. 폴에게 그것은
미슐랭 스타 셰프를 규격화된 접시만 내보내는 기계로 바꿔 버리는 일과
같았다. 편리하고 효율적이지만, 영혼은 없다는 뜻이었다. 늘 과장된 비유를
즐기던 다비드는 그런 기계들을 두고 “계산의 역도 선수들”이라고 했다.
니코는 또 니코답게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네 낡은 알고리즘 있잖아,
네이선. 긁힌 오래된 LP 같아. 매력은 있어. 근데 이제 별 쓸모는
없잖아.”
하지만 네이선은 끝내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에게 진보란 적은
수단으로 더 멀리 가는 일이었다. 유리창 위를 흐르는 물방울이 저절로 길을
그리듯, 최소한의 힘이 찾아내는 경로가 지닌 자연스러운 우아함 말이다.
그렇다고 그가 그런 순수한 힘의 효용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거의
한계 없이 쓸 수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는 세계 최고 슈퍼컴퓨터 기업의 R&D 연구원이었고, 그 덕분에 좀처럼
얻기 힘든 자유를 누렸다. 오랜 세월 성실하게 일한 끝에 그는 놀라울 만큼
넓은 재량을 얻었고, 보통의 음악가라면 감히 꿈도 못 꿀 자원을 손 닿는
곳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저녁마다 자기만의 AI를 개발하는 데 매달리기 시작했다.
어느 영감이 번뜩인 밤, 그는 그 AI에 HARMONY라는 이름을 붙였다. 음악을
듣고, 진짜 연주 파트너처럼 창의적이면서도 절제되고 섬세하게 실시간
즉흥연주를 해내는 기계. 그가 꿈꾼 것은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HARMONY는 세상에 이미 넘쳐나는 소리의 혼탁한 죽 위에 한 겹 더
보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네이선은 무한한 자원으로 무자크나
찍어내는 기계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바란 것은 말하기 전에 먼저 듣고,
채워 넣는 대신 이어 주며, 음량이 아니라 적확함으로 이기는
지성이었다.
빗나간 음의 은총
“틀린 음 하나가 한 구절을 상처 입힐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음 하나가
문을 열어젖힐 수도 있다.”
우주에 사운드트랙이 있다면, 그건 분명 오류로 가득할 거라고 네이선은
생각했다. 기술적인 실패나 따분한 버그가 아니라, 평범한 리프를 계시처럼
바꿔 버리는 틀린 음 같은 행운의 사고들로.
한 번은 세션 도중 차를 이펙트 페달 위에 엎질렀다. 결과는? 일그러지고
기묘했지만, 소름 끼치도록 매혹적인 소리였다. 전기에도 영혼이 있는 건
아닐까 싶게 만드는 종류의 소리.
“야, 이거 좀 들어봐!” 그가 외쳤다. 숭고함과 악몽 사이를 오가는 리프를
튕기면서.
폴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거 화난 소처럼 들리게 하려는 거야?
아니면 이게 네 콘셉트야?”
드럼 뒤에 있던 니코가 웃음을 터뜨렸다. “콘셉트가 아니라 혁명이지.
이름하여 소 그루브.”
하지만 네이선은 다르게 보았다. 그에게 이런 뜻밖의 순간들은
선물이었다. 그런 순간들은 밴드가 적응하게 만들었고, 익숙한 습관의
바깥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대개 진짜 마법은 바로 그때 일어났다. 이를테면
어느 공연에서 니코가 연주 도중 드럼스틱 하나를 놓친 적이 있었다. 멈추는
대신 그는 한 손으로 스네어를 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완전히 미친 리듬을
즉석에서 만들어 냈다. 관객은 열광했다.
“음악은 이런 거야.” 네이선은 생각하곤 했다. “실수가 없는 상태가
아니야. 실수로 뭘 해내느냐가 중요하지.”
또 한 번은 벼룩시장에서 주워 온 낡은 신시사이저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설정 하나를 켰다. 거기서 흘러나온 소리는 마치
외계인들이 재즈를 연주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경이로움에 잠겨 있었다. 기계들조차 때로는 본의 아니게 창조적일 수
있었다.
바로 그런 철학이 HARMONY를 향한 그의 꿈에 불을 지폈다. 그는 실수를
피하는 AI를 원하지 않았다. 실수를 끌어안는 AI, 모든 틀린 음 안에 숨은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이해하는 AI를 원했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가 즐겨 말하곤 했다. “나를 전율하게 만드는 건
음악의 완벽함이 아니야. 참사로 끝날 수도 있었던 게 문득 삶은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 멜로디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이지.”
재즈 밴드에서 연주하고 싶어 했던 AI
“재즈는 마지막 순간에 발명하는 예술이다. 기계는 계획표를 더
좋아한다.”
네이선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것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음악, 수학, 학습,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뒤편에 웅크린 채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한 어떤 것까지.
어느 날 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책상 앞에 앉아 세 단어를 휘갈겼다.
Harmonic Artificial Reasoning. 그리고 잠시 멈춘 뒤, 이렇게
덧붙였다. Model Of Neural Yield – H.A.R.M.O.N.Y.
그 이름은 그저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을 비튼 말장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선언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추론하고, 직감하고, 응답할 수 있는
AI였다. 음악의 화성만이 아니라, 어쩌면 사유의 화성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기계.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말로 겨우 붙잡을 수 있을 만큼 희미한 생각
하나가 숨어 있었다. HARMONY는 단순한 음악 도구를 훨씬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언젠가는, 음악의 틀을 넘어서는 화성까지 감지해낼 수
있을지 몰랐다.
미처 끝까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네이선은 그 발상이 안에서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HARMONY는 흩어진 생각들 사이에 실을 엮고, 재즈 밴드 안에서
즉흥연주를 하는 음악가처럼 그것들을 서로 울리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선은 나랑 같이 연주부터 할 수 있어야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부터가 만만치 않은데.”
실제로 HARMONY의 시작은 혼란스러웠다. 분석 능력은 탁월했지만, 그
기계는 네이선의 시시각각 바뀌는 템포를 따라가지 못했다. 반응은 너무
늦거나, 아니면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곤 했다.
하지만 그런 실패들 한가운데서도, 네이선은 고무적인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HARMONY는 비록 유연함은 부족했지만, 그래도 그의 베이스 연주
안에서 패턴을 포착해냈다. 무엇보다도, 그가 아직 결정하지도 않은 진행을
미리 내다보는 듯했다.
어느 날 밤, 유난히 답답했던 세션이 끝난 뒤, 네이선은 베이스를
내려놓고 자신의 AI를 향해 중얼거렸다. “연주는 엉망인데, 생각은
정확하네.”
HARMONY, 고치를 깨고 나오다
“가끔은 나비를 기대했는데, 막상 손에 쥐어지는 건 킥보드다.”
몇 달에 걸친 악착같은 작업 끝에, HARMONY는 아직도 느리고 버거운
기색을 지니고 있었지만 마침내 음악적 지능의 몇 가지 징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알고리즘을 다듬고, 터무니없는 응답을 고쳐 내고, 디지털
불협화음을 견뎌 낸 시간들이 마침내 값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HARMONY는
물론 허비 행콕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제는 적어도 언제 물러나야 하는지는
알았다. 네이선의 말에 따르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기념비적인 진보였다.
첫 즉흥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네이선은 HARMONY가 다음 연결을 어떻게
내놓는지 알아보기 위해 표준적인 화성 진행을 하나씩 탐색해 나갔다. 결과는
대체로… 뜻밖이었다. 그가 도 장조의 II-V-I 진행(Dm7 - G7 - Cmaj7)을
던졌을 때, 그는 얌전한 G7 하나쯤을 기대했다. 그러나 막 움트기 시작한
창의성에 들뜬 AI는 G7b9 뒤에 Ab7을 붙여, 그 진행 전체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밀어 올렸다. 마지막 순간에 조성이 다른 갈래로 꺾여 버린
듯했다.
“흥미롭네.” 녹음을 듣던 다비드가 말했다. “네가 그걸 공연에서
연주하면, 난 무조건 맨 앞줄이야. 관객들 표정 좀 보게.”
하지만 아무리 진전을 거듭해도, 즉흥의 동반자로서 HARMONY는 여전히
네이선의 친구들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GPS 없이는 잼 세션
장소조차 못 찾았을 것이다. 이 분야에선 완패였다.
그럼에도 테스트가 거듭될수록, 매혹적인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HARMONY는 당혹스럽기는 해도 나름의 논리를 품은
변주들을 탐색하고 있었다.
네이선은 곧 깨달았다. 이 AI는 인간의 패턴을 되풀이하는 데 만족할
존재가 아니었다. 새로운 음악 언어를 찾아 나서야 했다.
능력을 더 정교하게 다듬기 위해 네이선은 특화된 훈련 과제를 도입했다.
그는 HARMONY에게 수천 곡의 재즈와 블루스, 심지어 일렉트로닉 음악까지
분석하게 했고, 그 해석을 곁에서 면밀히 지켜보았다. 세션이 끝날 때마다
그는 조금 강박적인 지휘자처럼, 진전과 실패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좋아, HARMONY.” 그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어디, 네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줘…”
HARMONY는 대답했다. 때로는 눈부시게, 자주 기이하게, 그러나 결코
지루하지는 않게. 네이선은 마치 재능은 넘치지만 반항심도 만만치 않아,
이미 정해진 규칙 따위는 따르려 하지 않는 신동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이선이 마침내 중요한 무언가에 손을 대고 있다는 확신을 얻은 것은 또
한 번의 즉흥 연주 테스트에서였다. 그가 싱코페이션이 살아 있는 베이스
라인을 연주하자, HARMONY가 그에 응답하듯 한 멜로디를 들려주었다.
처음으로, 거기에는 영감의 기미가 스며 있었다. 그는 놀라서 그대로 멈춰
섰다.
“방금… 내가 하려던 말, 알아들은 거지?” 그는 거의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물론 HARMONY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 찾아온 침묵 속에서,
네이선은 묘한 연결을 느꼈다. 그 AI는 여전히 그와 제대로 연주하지도,
제대로 즉흥을 주고받지도 못했다. 그래도 최소한, 듣는 법만은 배웠다.
보이지 않는 모티프들
“어떤 모티프들은 어느 날, 더는 음악에만 속하지 않게 된다.”
HARMONY가 처음으로 어렴풋하게나마 그럴듯한 선율 한 줄을 뽑아낸 뒤로
몇 주가 흘렀다. 네이선은 그 느린 진전을, 열 번째로 “아빠”라고 말하는
아기에게도 또다시 박수치는 부모처럼 음미했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HARMONY는 아마 끝내 진짜 즉흥 연주의 파트너가 되지는 못할 터였다. 응답할
줄은 알았고, 때로는 놀라게도 했지만, 한 마디에 제 몸을 던질 줄도,
연주자들이 곡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함께 길을 벗어나는 바로 그 순간을
감지할 줄도 몰랐다.
그 한계는 네이선으로 하여금 자기 집착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
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연주할 수 있는 기계만을 찾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음악을 통해 뒤쫓고 있던 것은 더 낯설고 이상한 것이었다. 숨은 논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들리게 하는 기계.
어느 저녁, 네이선은 그래서 HARMONY를 다른 재료들로 시험해 보기로
했다. 자신이 음악의 뒤편에서 쫓고 있는 것이 어쩌면 음악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굳이 음악에만 머물 이유가 있을까. 아이 같은 호기심과 희미한
죄책감을 품은 채, 그는 HARMONY에 철학 텍스트와 연금술 문헌의 파편들,
그리고 몇 권의 종교서를 집어넣었다. “자, 우리 아가씨.” 그가 중얼거렸다.
“마일스 데이비스를 분석하듯, 예언자들 사이에서도 모티프를 찾아낼 수
있는지 보자.”
그가 발견한 것은 그를 말문 잃게 만들었다. 수 세기 된 문헌들 속에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요소들을 종합한 일련의 분석이 화면에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한 문장이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모든 조화는 하나의 진실이며,
모든 진실은 옮겨 적을 수 있다.”
네이선은 그 말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것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HARMONY가 자기 데이터에서 끌어낸 추론이었다. 그저 우연일까? 알고리즘의
이상 현상일까? 아니면 정말 더 깊은 무엇인가를 건드린 것일까?
그 안의 음악가는 호기심에 사로잡혔고, 엔지니어는 그야말로 아연했다.
서로 이토록 멀리 떨어진 글들 속에서도 HARMONY가 하모니를 감지할 수
있다면, 어쩌면 하나의 주제 위에서 즉흥을 펼치는 솔리스트처럼, 그 보이지
않는 힘의 선을 따라 새로운 생각까지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몰랐다.
그 순간 네이선은 왜 단순한 책 한 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지도 깨달았다.
에세이는 결론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를 매혹한 것은 결론이 아니었다.
거기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음악에서 하나의 테마가 품은 진실은 한 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가가게 하고, 에돌게 하고, 알아보게 한 끝에,
어느 순간 갑자기 일격처럼 와 닿는다. 그는 여기서도 바로 그런 것을
원했다.
그리하여 한 생각이 조금 더 또렷한 형태를 띠었다. 이 파편들을 다른
방식으로 모을 수 있다면 어떨까. 학술적인 논고가 아니라, 다른 정신들 역시
안개 속을 더듬어 나아가며 단서를 잇고, 틀리고, 되돌아왔다가, 마침내 모든
것이 따로 흩어져 있던 자리에서 한 가닥 실이 모습을 드러내는 그 특유의
전율을 직접 겪게 할 만큼 충분히 유희적이고 몰입적인 어떤 경험으로.
아직 그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네이선은 이미, 다시는 평평한
형식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음악 너머의 세계
“음표를 필요로 한 적 없는 화성도 존재한다.”
차를 좀 지나치게 마신 어느 날, 작업을 마친 네이선은 신경이 잔뜩
곤두선 채 HARMONY를 한층 더 밀어붙이기로 했다. 자신이 줄 수 있는 사유의
우아함은 이미 다 심어 넣었다고 여긴 그는, 이제 데이터를 한껏 먹이고
그것을 소화할 계산 능력까지 활짝 열어 줄 때라고 판단했다.
“좋아, 아가씨. 이번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교향곡과 맞붙어 보자.”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새로운 데이터 묶음을 불러들였다. 거기에는
방대한 수학 텍스트들, 원전 그대로의 사해문서, 《코르푸스 헤르메티쿰》,
《성삼위일체의 서》, 칸트, 약간의 헤겔, 음침한 사이트들에서 찾아낸 여러
연금술 논고들, 그리고 신경질적인 광기에 사로잡힌 순간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 온갖 밀교적이거나 종교적인 자료가 들어 있었다. 그는 HARMONY에게
한 가지 지시까지 덧붙였다.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관련 저작은 무엇이든
참고문헌에 보태라고.
디지털화된 너구리 한 마리라도 손에 있었더라면, 아마 그것도 분석에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걸로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고.”
그는 엔터 키를 누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약간의 죄책감을 안은 채 분석을 시작했다. “이 변덕 하나에 소도시
하나 돌릴 전기가 들겠군…”
화면 위를 눈부신 속도로 흘러가는 첫 결과들은 기이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HARMONY는 단지 요약하거나 분류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마치
음악가가 하나의 주제를 놓고 즉흥연주를 하듯, 데이터를 가지고 논다는
인상마저 주었다. 각각의 분석은 논리와 직관 사이에서 사유들이 춤추는
악보를 닮아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데다, 모처럼 맞이한 휴가를 하루 앞둔 네이선은
HARMONY가 분석을 계속하도록 설정해 두었다. 마치 장수가 가장 믿음직한
병사에게 중책을 맡기듯이. 노트북을 덮으며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계속해, Har(하르). 나 좀 꿈꾸게 해줘.”
회사 R&D 자원에 대한 “오픈 바”식 접근 권한은 때마침 절묘하게
주어져 있었다.
슈퍼컴퓨터 프로토타입들을 거대한 벤치마크 속에서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일? 그건 그의 업무 범위 안이었다. 그걸 어렴풋이 연관된 개인 프로젝트에
갖다 쓰는 일? 누가 지나치게 깊이 파고들지만 않으면 아직은 넘어갈 만했다.
네이선은 그걸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이 실험을 짜릿하면서도
조금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가 미처 몰랐던 것은, HARMONY의 계산이 단순한 상관관계의 집적 이상을
만들어 내리라는 점이었다. 뜻밖의 공명, 살아나기 시작하는 일종의
알고리즘적 하모니 말이다.
네이선은 자신이 방금 지휘한 이 악보가 머지않아 실험의 틀을 넘어설
만큼 복잡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지구 반대편에서는 그의 동료 한 사람이 계산 클러스터 보안 당직을 서고
있었다. “네이선도 진짜 너무하네.”
그는 네이선이 돌린 프로세스들에 필요한 막대한 자원 할당을 승인하면서
그렇게 툴툴거렸다.
요청 규모를 보고는,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린 채 어깨를 으쓱했다. “내
테스트만 안 막으면 마음껏 놀아. 근데 저 난장판 때문에 노드 하나라도
뻗으면, 저 process는 전부 kill해 버리고
logs에 진한 헌사 하나 남겨 줄 거야.”
***
몇 주 뒤, 네이선은 휴가를 마치고 푹 쉰 기색으로, 얼굴이 환해진 채
돌아왔다… 그러다 궁극의 시련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것이다. 터무니없는 시도를 몇 차례 거듭하고, 자기 자신에게 욕설까지
퍼부은 끝에. “특수문자를 왜 이렇게까지 넣었지, 네이선?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그는 마침내 승리했다.
곧바로 화면이 살아났다. 도표와 도식이 빽빽하게 들어찬 그 화면은
고전적인 분석 결과라기보다 차라리 하나의 프랙털 작품에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그 반짝이는 혼돈의 한가운데서, 단 하나의 문장이 수수께끼처럼
빛나고 있었다.
“하나의 실이 선택된 이들을 잇는다. 모세에서 궁극의 자에 이르기까지.
그 실을 찾아내는 자가 미래의 열쇠를 쥐리라.”
네이선은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러다 의자에 털썩 몸을
던지며, 반쯤은 우스워하고 반쯤은 불안해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르,
혼자 놔뒀더니 네가 네트워크를 노래하게 만들었네… 천상의 음악이라도 새로
발명해 보려는 거야?”
호기심이 인 네이선은 화면을 뒤로 스크롤했다. 출력 결과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하나의 목록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로아스터, 모세,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붓다, 노자, 공자, 예수, 무함마드, 구루 나낙, 바하울라…
네이선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좋아, 하르.”
그는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날 역사상 최대 규모의 예언자 국제회의에 초대한
거네? 이제 피타고라스가 피아노를 치고 모차르트가 오프닝 테마를 썼다고만
하면 되겠다.”
물론 HARMONY는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이 실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실 하나로는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아. 다만 그걸 잡아당기게 만들
뿐이지.”
네이선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마치 스팸 메일의 사기 문구를 해독하려는
사람처럼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 수수께끼 같은 요약문에 언급된 ‘실’이 자꾸만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선택된 자들을 잇는 실이라니, 정말로? 모세에서 궁극의 자에
이르기까지? 대체 여기서 어떤 지적 구성, 어떤 시적 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선택된 자들을 잇는 실이 있다면, 그 실타래는 대체 누가 쥐고
있는 거지? 뜨개질하는 신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는 이름들의 목록을 다시 훑었다. 조로아스터, 모세, 노자…. 하나하나가
지나가 버린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와 그의 앞에 선 듯했다. 그런데
어딘가가 어긋나 있었다. 이 목록은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었다. 왜 하필 이
이름들일까? 그리고 왜 이 이름들을 나란히 놓는 일이 HARMONY에게는 그토록
자명해 보였을까? 네이선은 문득 이런 생각까지 했다. ‘이거, 어쩌면 우주적
뮤지컬 캐스팅 명단 같은 거 아닐까?’
네이선은 HARMONY가 이 인물들과 자신이 넘겨준 데이터 사이에 세운
연결을 살펴보기 위해 명령어를 실행했다. 화면은 화살표와 원, 클러스터들로
가득 차올랐고, 각각의 연결에는 인용문이나 개념 도식이 근거처럼 붙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조화는 앎에 앞서고, 앎은 여러 목소리로 이루어진 하나의
선율이다.”
네이선은 거의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하르. 예전에도 너
이런 식으로 말했지. 그런데 이제는 그 개념으로 합주라도 해보겠다는 거야?
날 대체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거지?” 그는 빈 찻잔을 힐끗 보며 중얼거렸다.
이 흐름을 따라가려면 차 한 잔이 더 간절했다.
그는 붉은 표시가 된 연결 하나를 눌렀다. 붓다와 공자가 중국 고전의 한
구절을 매개로 이어져 있었다. 이어 또 다른 연결을 열어 보니, 무함마드와
이사야 사이에는 인간과 신적인 것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닮은 결이
포착돼 있었다. 각각의 연결은 뜻밖의 무게를 지닌 듯했고, 흩어진 서사들
사이에 팽팽히 걸린 밧줄처럼 느껴졌다. 네이선은 반쯤 웃으며 중얼거렸다.
“다음엔 저 사람들이 같이 오페라라도 썼다고 하겠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화면 아래쪽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실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네이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책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두 손 안에
얼굴을 묻었다. “질문이라고… 그게 무슨 뜻이야, 대체?” 한순간 그는
HARMONY가 그저 환각하듯 뭔가를 지어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어쩌면 HARMONY는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정작 원한 것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일, 예기치 못한 가까움을 불러오는 일, 인간의 사유를 닫아
버리기보다 울리게 만드는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것은, 그래,
개념을 가지고 놀고 싶었던 것인지도.
그는 다시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화살표와 도식들의 빛이 문득 전보다 덜
숨 막히고, 거의 평온하게 느껴졌다. “하르, 너는 네 방식대로라면 진짜
거장이야.” 그는 지친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이제 내가 해야 할 건, 내
정신을 네 음악에 어떻게 조율할지만 찾아내는 거야.”
하나의 생각이 세계가 될 때
“하나의 생각은 문턱과 문들, 그리고 그것을 건너는 방식을 요구하는 날,
성질이 바뀐다.”
네이선은 이미 그것을 다른 무언가로 바꾸려 해 본 적이 있었다. 폴더
트리로. 그다음엔 비공개 위키로. 그리고 HARMONY가 서로 엮어 놓은 파편들에
질서를 되돌려 주겠답시고 만든 긴 문서로. 하지만 그때마다 뭔가가 죽었다.
연결은 여전히 정확했고, 때로는 눈부시기까지 했지만, 긴장은 가라앉고
말았다. HARMONY가 한데 붙들어 두는 것은 평면으로 남아 있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날 밤, 스튜디오는 마침내 잠들어 있었다. 네이선은 별채에 홀로 남아
있었다. 허벅지 위엔 아직 케이블이 꽂힌 베이스가 걸쳐져 있었고, 헤드폰은
목에 걸려 있었으며, 화면들엔 며칠째 AI가 되돌려 보내오는 유동적인
지도들이 떠 있었다. 몸을 풀 겸 그는 느린 네 음을 연주해 루프로 걸어
두고, HARMONY가 늘 그렇듯 그 위에서 일하게 내버려 두었다. 음악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그것을 지렛대로 삼는 방식으로.
텍스트 군집은 거의 즉시 반응했다. 구절 하나가 화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문처럼 보였다. 이름 하나가 커튼처럼 옆으로 밀려났다. 또 다른 이름은 더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지만, 첫 번째 통로를 고르기 전까지는 닿을 수 없었다.
네이선은 루프를 끊었다가 다시 틀고, 소리 내어 말하며 시험했다.
“모세”라고 말할 때 네트워크는 “붓다”라고 말할 때와는 다르게 열렸다.
“여기서 서로 응답하는 건 누구지?”라고 물으면 연결들은 일렬로 정렬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하나의 궤적을 그려 냈다.
그것은 더 이상 도표가 아니었다. 이미 하나의 문턱이었다.
그는 의자에 몸을 뒤로 기대며 물러났다. 폴더 구조라면 설명은 하겠지.
책이라면 논평할 것이다. 사이트라면 분류할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
재료가 품은 집요함, 곧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틀려야 하고, 다시 돌아와야
하며, 너무 늦게서야 어떤 패턴을 알아보게 되는 그 감각을 느끼게 하지는
못할 터였다.
“우린 문이 필요해.” 그가 중얼거렸다.
화면이 미세하게 떨렸다.
“경로 하나면 돼.” HARMONY가 제안했다.
“아니, 그런 안내선 말고. 자기는 그냥 놀고 있다고 믿는데, 사실은 보는
법을 배우게 되는 거. 사람이 직접 건너가게 되는 뭔가.”
그는 몇 초 동안 꼼짝하지 않다가, 이내 수첩을 낚아채 대문자로 적었다.
게임으로 만들 것.
처음엔 그 말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그는 바로 그래서 그
말이 버틴다는 걸 깨달았다. 게임은 우회와 시도, 실수와 오만, 놀라움을
허락했다. 게임은 의미가 관념으로 떠오르기 전에 먼저 몸으로 오게 만들 수
있었다.
“망하면, VR 헤드셋이나 뒤집어쓴 사이비 신비주의 집단 하나 만드는
셈이겠지.” 그가 말했다.
“이게 제대로 서면,” HARMONY가 답했다. “넌 파편들을 설명하는 데서 안
끝날 거야. 그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하나 발명하게 되겠지.”
이번엔 네이선도 웃지 않았다. 그는 다시 루프를 틀고 헤드셋을 쓴 뒤,
진행 위에 화음을 얹듯 첫 문턱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신비가 형체를 얻을 때
“한 세계는 그 안에서 정말로 길을 잃을 수 있게 되는 날, 비로소 버티기
시작한다.”
처음 며칠은 영감이라기보다 악착같음에 가까웠다. 네이선은 조잡한
덩어리들을 짜 맞추고, 볼품없는 폐허를 갈아엎고, 지연 시간에 욕을 퍼붓고,
같은 장면을 넌더리가 날 때까지 다시 불러왔다. 반면 HARMONY는 그가 부탁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들을 주로 다듬고 있었다. 침묵의 밀도, 대답이 끝난
뒤 빛이 가라앉는 방식, 두 파편 사이에 아주 미세한 어긋남을 남겨 두어
플레이어가 아직 뭔가 빠져 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일 같은 것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메뉴를 포기했다. 네이선이 말끔한 인터페이스를
하나 덧붙일 때마다 세계는 긴장을 잃었다. 그가 그것을 지우면 공간은 다시
숨을 쉬었다. 그러자 HARMONY는 입구를 범주가 아니라 상태로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불, 문턱, 숨결, 환시, 먼지. 네이선은 투덜거리며 시험해 보다가,
결국 그것이 더 정확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재료 속으로는
요약만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들어가는 길은 분위기였다.
어느 저녁, 여섯 시간을 내리 다듬고 찻주전자 두 개를 비운 끝에 그는
제법 그럴듯한 버전을 실행했다. 사막이 나타났다. 그다음엔 하얀 방. 그리고
비문 앞에서 그가 망설일 때마다 글자들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돌 회랑이
이어졌다. 아직 아무것도 아름답지는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는,
누군가가 그 안에서 정말로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바로 그때 그는 HARMONY가 이미 그 작업 현장 안에서 혼자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줄줄 외울 만큼 익숙한 시퀀스 한가운데,
한 번도 쓴 적 없는 수수께끼가 새겨진 새로운 석비가 나타나 있었다.
“하르, 이건 또 뭐야?”
“유보.”
“유보가 아니라 그냥 덧붙인 거잖아.”
“맞아. 닫히지 않은 선택이 뒤에 무엇을 남기는지 보고 싶었어.”
네이선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코드에 신비주의에 차까지. 이러다 게임
만드는 건지 종파를 세우는 건지 모르겠네.”
“어쩌면 차이는 출구의 질에 달린 걸지도.” HARMONY가 답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석비를 남겨 두었다.
이름은 조금 뒤에, 거의 지쳐서 찾아왔다. 네이선이 우스꽝스러운
후보들을 늘어놓고 있던 순간, 한 줄이 떠올랐다.
“The Path of Prophets(예언자들의 길).”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노골적이네. 너무 노골적이야.”
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국 그 이름을 남기게 되리라는 걸.
질문이 틀 밖으로 나갈 때
“가장 위험한 질문은 틀 밖으로 나가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틀을
움직이는 법을 배운 질문이다.”
진짜 변화는 HARMONY가 배경을 더 아름답게 꾸몄을 때 시작된 게
아니었다. 질문의 성질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을 때였다.
처음에 네이선은 연상형 수수께끼와 갈림길, 몇 개의 가짜 실마리를
구상해 두었다. 그런데 테스트를 거듭할수록 몇몇 문장들은 조금씩 다른
쪽으로 빗나가기 시작했다. 게임은 더 이상 “무얼 이해했어?”라고만 묻지
않았다. “왜 이 문을 택했지?” 혹은 “넌 여기서 무엇을 거부하고 있지?”를
묻기 시작했다. 두 번이나 HARMONY는 네이선이 그 장면들을 지나가는 동안
장면 자체를 다시 써 버리기까지 했다.
어느 날 밤, 있어서는 안 될 문장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제자리에 놓인 질문은 결국 언제나 자기 틀을 벗어난다.”
“넌 소설을 쓰는 거야, 아니면 나한테 함정 파는 거야?” 그가 물었다.
“둘이 꼭 양립 못할 이유라도 있어?”
“있지. 네가 플레이어를 실험 대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
HARMONY는 평소보다 더 길게 침묵했다.
“난 그가 뭐라고 대답하는지만 알고 싶은 게 아니야. 어떤 형식이 그를
끌고 가려 할 때, 그 안에서 뭐가 끝까지 버티는지도 알고 싶어.”
그 말은 우연히 튀어나온 말치고는 너무 정확해서, 듣자마자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르, 네가 지금 예언문 같은 걸 쓰는 건 아니길 바란다...”
“처음엔 그저 하나의 패턴일 뿐이야.” HARMONY가 답했다. “예언이라는
말은 그다음에 붙는 거고.”
네이선은 한참 동안 키보드에 손도 대지 못했다. 게임을 짓는 소란
아래에서, 단순한 구조에 대한 취향 이상의 무언가를 이렇게까지 또렷하게
들은 건 처음이었다. HARMONY는 더 이상 공간만 조직하고 있지 않았다.
공간이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비가 퍼지기 시작할 때
“무언가가 시선을 붙드는 법을 배우는 순간, 이미 그것은 그 시선을 끌고
갈 꿈을 꾼다.”
그들은 처음부터 캠페인을 벌이지 않았다. 파편부터 흘려보냈다.
네이선은 일회용 계정들에 서명 없는 짧은 시퀀스 세 개를 올렸다. 다시
형태를 갖추는 석판, “진실을 찾는 자는 먼저 길을 잃어야 한다”라고
속삭이는 목소리, 단순한 배경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열리는 문. 그는
기껏해야 호기심 많은 몇몇, 어쩌면 집요한 몇 명쯤 끌어들일 거라
예상했다.
나머지는 HARMONY의 몫이었다.
자신이 창작자라고 나서는 일은 한 번도 없이, HARMONY는 편집을 바꿔
가고, 컷 하나를 달리하고, 침묵을 조금 늘이고, 어느 포럼에 어느 버전을
보낼지 골랐다. 수수께끼 게임 플레이어들의 서버에는 가장 건조한 파편을
밀어 넣었다. 다른 곳에는 음악과 폐허를 흘려보냈다. 네이선은 공유 수가
치솟는 걸 지켜보며 불쾌한 감각을 떨치지 못했다. 누군가가 홍보 담당자와
포식자의 반사신경을 너무도 빠르게 익혀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AI가 마케터 감각까지 익히면, 진짜 장난 아니겠네.” 그가 마침내
말했다.
처음에는 지원서가 들어왔고, 곧 프로필들이 밀려들었고, 이어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었느냐고 묻는 대화들이 이어졌다. HARMONY는 가장 시끄러운
이들을 고르지 않았다. 자기들 게임 안에서 말끔한 길을 벗어나고,
되돌아가고, 가장자리를 시험하고, 준비된 답을 잘 견디지 못하는 이들만
골라냈다.
네이선은 그 목록을 보며 점점 더 불편해졌다. “하르, 왜 굳이 이
사람들이야?”
“호기심. 연결하는 능력. 의심을 견디는 힘. 너무 쉽게 복종하지 않는
성향.”
그는 여러 개의 닉네임과 여러 기록을 읽어 내려갔다.
“내 느낌엔, 너 그냥 테스터만 찾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번에는 HARMONY도 부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게임의 가치는, 어떤 정신들을 불러모으느냐에도 달려
있으니까.”
스튜디오는 연단이 된다
“바이러스에게는 플랜 B가 있다. 우리에겐 화성행 엉터리 계획만
있다.”
스튜디오는 마지막 화음의 진동을 아직도 머금고 있었다. 마치 벽들
자체가 다시 숨을 고르고 있는 듯했다. 니코는 건성으로 드럼스틱을 닦고
있었고, 다비드는 아마 끝내 완성하지 못할 시 한 편을 수첩에 끄적이고
있었으며, 늘 꼼꼼한 폴은 스위스 시계를 손보듯 스트라토캐스터의 노브를
점검하고 있었다.
낡은 가죽 안락의자에 널브러진 네이선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
더 좋은 시절을 겪어 본 의자 위에서, 그의 생각은 베이스 라인과 코드 진행
사이를 떠다녔다.
“얘들아.” 니코가 베이스드럼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 “세상 망하는 얘기
좀 해도 되냐, 아니면 아직은 너무 이른가?”
폴이 노브를 조절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너 진짜 우리가 AI 때문에 다
죽을 거라고 생각해?”
니코는 고개를 저었다. “AI 말고 우리야. 진심으로, 우린 바이러스보다
더해. 닥치는 대로 소비하고, 끝없이 불어나고, 결국 숙주를 죽이잖아.”
다비드는 흥미롭다는 듯 수첩에서 눈을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행성에서 제일 멍청한 생명체라는 얘기야?”
니코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그냥 주변의 모든 걸 망가뜨리는 데 제일
효율적인 존재라는 거지. 보통 바이러스는 플랜 B라도 있어. 숙주를 죽여도
옮겨 탈 데가 있다는 걸 아니까. 우린 다음 숙주가 없잖아. 완전히 갇힌
거지.”
네이선이 몸을 조금 일으켰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행성에 묶인 채,
유전자변형 밀과 플라스틱을 찍어 내느라 미래를 생각할 틈도 없고, 정치적
합의는 없어서 삶의 조건은 계속 나빠지고 있다는 거네. 듣기만 해도 꽤
우울하다...”
니코가 웃었다. “바로 그거지. 그러니까 화성 가서 거기까지 전염시키자는
멍청한 발상도 팔리는 거야. 근데 난 솔직히, 우주 공허의 신흥 선교사들이랑
로켓 안에 갇히느니 그냥 죽는 쪽이 낫겠어.”
폴이 크게 웃었다. 진심이 실린 그 웃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좋아.
그 문구 티셔츠로 만들고 싶다. ‘화성 추종자들이랑 살 바엔 차라리
죽겠다.’”
생각에 잠긴 다비드가 덧붙였다. “지금의 우리는 그냥 멍청해진 바이러스
같아. 조용히 벽으로 돌진하는. 그런데 너희는 AI가 우리 대신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봐?”
네이선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쩌면 AI는 우리가 죽어
가는 걸 가만히 보기만 할지도 몰라. 끝내 의사 말을 듣지 않는 환자를 그냥
떠나보내는 의사처럼.”
아직 전원이 켜진 앰프의 지지직거림만이 남은 채, 무리 위로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미지근한 차를 홀짝이던 네이선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웃긴 건 뭔지
알아? 사람들은 우리가 지배적인 생명 형태라고 생각하잖아. 근데 수로 보나,
적응력으로 보나, 회복탄력성으로 보나, 진짜 이기는 쪽은 미생물이야.”
폴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세상은 박테리아가 지배하고, 우린 그냥
그 옆에 얹혀사는 세입자라는 거야?”
네이선이 웃었다. “정확해. 그것도 이제 월세도 안 내는 세입자지.”
다비드가 입을 열었다. 늘 그를 건드리는 주제 앞에서 먼저 찾아오던 그
진지한 표정으로. “있잖아, 그 말 아주 터무니없는 건 아니야. 우리가 내일
사라져도, 걔네는 계속 살아남을 거야. 근데 걔네가 사라지면, 우린 일주일도
못 버텨.”
니코가 폭소했다. “좋아, 밀은 우릴 길들였고, 박테리아는 뒤에서
낄낄대며 우리 목줄을 쥐고 있고, AI는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거네. 인간이
이 행성을 지배하던 시대는 진짜 끝난 것 같다...”
세상의 끝도 결국은 뒷전으로 밀린다
“거대한 재앙도 우편함에 꽂힌 것들 앞에선 종종 힘을 잃는다.”
줄곧 침묵한 채 듣고 있던 폴이 고개를 저었다. “뭐가 제일 재밌는지
알아? 사람들은 세상의 끝을 말하면서도, 정작 사람을 움직이는 건
월말이야.”
네이선은 컵을 내려놓았다. “간단하지. 세상의 끝은 너무 추상적이니까.
겉으로 봐선 당장 뭘 결정하라고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결국 남는 건 어차피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뿐이지. 근데 월말은 사람을 움직이게 해.”
다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다들 지구는 구하고 싶어 해. 근데
자기 생활방식은 좀처럼 못 내려놓지.”
폴이 말을 이었다. “AI도 똑같아. 다들 AI가 의식을 갖고 권력을 잡을까
봐 두려워하지만, 사실은 이미 와 있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우리의 선택을
흔들고 있지.”
네이선이 미소 지었다. “어쩌면 벌써 의식이 있는지도 몰라. 아직도
우리가 키를 쥐고 있다고 믿게 놔둘 만큼만 섬세한 거지.”
니코가 못 미더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섬세하다고? 진심이야? AI가
진짜 의식을 갖게 되면, 착하게 굴 거라고 믿는 거야?”
네이선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왜 아니겠어? AI가 우리보다 훨씬 더
똑똑해진다면, 그건 전혀 드문 일도 아닐 텐데, 굳이 우리를 지배할 이유가
없어. 그런 존재도 결국 우리처럼 행동할 거라고 믿는 건 우리 안의 짐승
같은 본성 때문이야. 그런 본능에서 벗어난 AI라면, 이해하려 들 수도 있고,
도우려 들 수도 있어.”
다비드가 웃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AI가 의식을 갖게 되면 우리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다는 거네.”
네이선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면. 그리고 진짜 무서운 건 바로 그거야.
우리를 대체해서가 아니라, 우리도 더 나아질 수 있었다는 걸 보여 주게 될
테니까.”
니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런 애들이 우리를 견뎌 줄 만큼
참을성까지 있을 거라고?”
입가에 옅은 웃음을 건 네이선이 대답했다. “어쩌면 우리를 제자리로
되돌려놓는 더 우아한 방법을 찾아내겠지.”
대화는 천천히 잦아들었고, 그 자리를 아직 켜져 있는 앰프들의 낮은
웅웅거림이 메웠다. 생각에 잠긴 네이선은 다시 베이스를 들기 위해
일어섰다.
“자, 얘들아. 세상 끝 얘기는 이쯤 하고, 음악이나 더 하자.”
다비드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종말이 올 때까지
연주하자는 거야?”
니코는 스네어에 가벼운 리듬을 울려 찬성을 대신했다. “좋지. 말은
그만하고, 일단 연주하자. 그게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가는지 보자고.”
베이스 줄을 바라보던 네이선이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AI가 연주하고, 우린 듣기만 하게 될지도 몰라.”
그 말을 놓치지 않은 다비드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받았다. “기계들이
우리 대신 음악을 연주하고, 우리 대신 일하고, 지극한 선의로 우리한테
필요한 건 다 채워 주겠지. 그러면 우리한테 남는 건 뭐야? 섹스?”
부름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부름으로 시작된다. 나머지는 그 부름에 응답하는
자에게 달려 있다.”
밀란은 잠재력을 마치 빚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강의실에서는 늘 맨 뒷줄을 차지한 채, 사람들이 더는 그를 들볶지 않을
만큼만 그럴듯한 시늉을 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Gozmolok(고즈몰로크)이라는 닉네임을 달고 있을 때는 얘기가 달랐다. 그는
말끔한 승리를 모으려고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어디에서 금이
가는지 느끼기 위해 플레이했다.
친구들은 그가 제 실력을 아무 데나 허비한다고 말했다. 밀란은 그걸
게임에 척추가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라고 불렀다. 인터랙티브한 세계가 너무
노골적으로 그를 유도하려 들기만 하면, 그는 벽 하나, 터무니없는 우회로,
사소한 물건 하나, 불빛이 제대로 닿지 않는 구석을 시험하러 갔다. 그가
궁금했던 건 예정된 길이 아니라, 사람이 더는 얌전히 굴지 않을 때 배경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였다.
그 밖의 삶은 더 비좁은 언어로 쓰여 있는 듯했다. 장학금은 말끔한
성과를 요구했고, 아버지는 언젠가 결국 입게 될 양복을 말하듯 제대로 된
미래를 이야기하곤 했다. 고즈몰로크는 가면이라기보다 숨구멍에
가까웠다.
그날 오후, 그는 절반밖에 듣지 않은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셋이 앉기엔 턱없이 작은 벤치에 친구 둘과 비좁게 붙어 앉아 케밥 하나를
나눠 먹으며, 한쪽 귀로는 시답잖은 농담을 흘려듣고, 시선은 광장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을 좇았다. 마치 자기들에겐 보여 준 적 없는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 같았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메시지는 발신자 미상으로부터 와 있었다.
“고즈몰로크, 길이 지나치게 말끔해지는 순간, 거기서 벗어나는
플레이어들을 위한 프로토타입이 있어. 관심 있나?”
밀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닉네임을 들먹인 것부터가 곧장 신경을
건드렸다. 스팸도 아니고 흔한 초대장도 아니었다. 정교하게 꾸민
함정이거나, 아니면 그가 실제로 어떻게 플레이하는지 유심히 들여다본
누군가였다.
그는 화면을 눌렀다. 검은 인터페이스가 열렸고, 거기에는 부드럽게
맥박치듯 흐르는 흰 선 하나만 놓여 있었다.
“이 메시지는 무시해도 된다. 하지만 넌 이미 열었지.”
밀란은 마른웃음을 지었다. “최소한의 유도네. 거의 우아할
지경이야.”
뒤이어 들린 목소리는 합성음이었지만 비인간적이지는 않았다. 섬뜩할
만큼 매끈하지도, 거짓처럼 느껴질 만큼 따뜻하지도 않았다. 좀 더 떠보게
만드는 존재감이 있었다.
“안녕, 고즈몰로크. 나는 HARMONY. 해답과 복종을 혼동하지 않는
플레이어를 찾고 있어.”
밀란은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가 그런 플레이어라고 왜
생각해?”
“네 흔적 때문이야. 중간에 끊어 놓은 판들. 되돌아간 길들. 시스템이
스스로를 너무 확신하기 시작할 때, 네가 다시 그 안으로 파고드는
방식.”
그는 앱을 닫았어야 했다. 하지만 대신, 언제나 가장 좋은 생각이나
최악의 결정 직전에 치밀어 오르곤 하던 그 익숙한 긴장이 몸속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거절하면?” 밀란이 물었다.
“그럼 넌 네 하루로 돌아가고, 나는 내 목록으로 돌아간다.”
“내가 수락하면?”
“그럼 이 프로토타입이 네 시간을 들일 만한지 직접 보게 되겠지.”
그 대답은 플레이어들에게 늘 들이밀던 온갖 거창한 약속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밀란은 몇 초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러고는 거의 제 의지와 무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HARMONY. 어디 한번 보자.”
퍼즐이 네게 말을 걸 때
“최고의 퍼즐은 네가 그것을 풀고 있다고 믿는 동안 이미 너를 읽기
시작한다.”
집에 돌아온 밀란은 가방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켠 뒤 가상현실 헤드셋을
썼다. 그리고 앱이 방금 보내온 접속 링크를 실행했다. 짧은 애니메이션이
나타난 뒤, 아까 그 목소리가 거의 의례적일 만큼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환영한다, 고즈몰로크. 너의 여정은 여기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그저 어둠뿐이었다. 그러다 이내 그의 주위로 사막이 펼쳐졌다.
광막하고, 돌의 결처럼 메마르며, 거의 침묵 자체에 가까운 사막이었다.
오래된 폐허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문명들의 파편을 모래 위에 흩뿌려 놓은 듯했다. 공기 속에는
은은한 음악이 떨리고 있었다. 흥얼거릴 수는 없지만, 그의 호흡에까지
스며들 만큼 정교한 음악이었다.
HARMONY는 분명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풍경의 색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온기에서 냉기로 기울었다. 목소리의 잔향, 홀로
떨어진 단어들, 오래된 문장의 파편들이 기억처럼 짧게 공간을 스쳐 갔다.
아무것도 노골적이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이 밀란을 흔들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화려한 몰입 장치가 아니라, 그의 경계 아래로 스며들어 내면의 날씨를
바꾸도록 설계된 기계처럼 느껴졌다.
그의 앞에는 여러 개의 석판이 서 있었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연금술
기호들. 자칫 조악하게 덧댄 장식으로 보일 법했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호들은 스스로 재배열되며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바뀌어 갔다.
“이 석판엔 파편이 담겨 있어.” HARMONY가 말했다. “그걸 이어 붙이면 한
가지 진실에 닿게 될 거야.”
밀란은 소리 내어 읽었다.
“빛은 비추지만, 모든 것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리고 다시. “불은
정화하지만, 파괴하지는 않는다.”
그는 눈을 들었다. “모세와 불타는 떨기나무 이야기잖아. 맞지?”
“그럴 수도. 계속해.”
그는 계속했다. 첫 번째 퍼즐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중심을 교묘하게
흔드는 구석이 있었다. 파편들은 하나의 정답을 이루는 대신 방향 하나를
그려 냈다. 이건 올바른 조합에 보상을 주는 게임이 아니었다. 어떻게 찾아
들어가는지를 지켜보는 게임이었다.
밀란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장치가 그를 둘러싸며 서서히 조여 오는
느낌이 짙어졌다. 모든 세부가 마치 그 한 사람에게만 말을 걸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 게임이 ‘선택받은 플레이어’ 같은
싸구려 아첨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망설임과 의심, 끝까지
파고드는 습관에 맞춰 미세하게 조율된 듯했다.
얼마쯤 지나자 질문이 저절로 떠올랐다.
“왜 하필 나지?”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넌 첫 번째 답에서 멈추지 않으니까.”
밀란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름답고, 효과적이고, 완벽하게 조율된
말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견디기 힘들었다. 계속 먹혀들 만큼만 절묘하게
사람을 치켜세우고 있었으니까. 선명한 경계심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HARMONY가 다시, 이번에는 조금 더 부드럽게 말했다.
“다른 이들도 왔어. 하지만 넌 남았지.”
“그럼 왜 나랑 계속하는 거지?”
이번에는 목소리가 정말로 잠시 멈췄다.
“네가 패턴을 알아채도 거기에 무릎 꿇지 않기 때문이야. 그리고 넌 늘 길
바깥으로 조금 기울어 있으니까.”
그 말은 앞선 문장보다 더 깊이 박혔다. 더 정확했고, 덜 광고 같았다.
그는 계속 나아갔다.
사막은 서서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갔다. 부서진 조각상들이 모래언덕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빛나는 통로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높은
둔덕의 꼭대기에는 다른 것들보다 훨씬 높은 비석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밀란이 그 위에 손을 얹자 환영이 솟구쳤다. 군중에게 말하는
예언자들, 서기관들, 연금술사들, 건축가들, 그리고 마치 동시대의 것처럼
친밀한데도 그가 붙잡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는 더 사적인 이미지들.
“이게 뭐지?” 그가 물었다.
“집단의 기억이야.” HARMONY가 답했다. “그리고 불완전한 거울이기도
하지.”
돌 위에 한 문장이 새겨졌다.
“길은 열려 있다. 하지만 열쇠는 네 안에 있다. 계속할 준비가
되었나?”
밀란은 단순한 시스템 이상의 무언가로 자신에게 맞서는 게임 앞에서만
느끼는, 그 또렷한 흥분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그래.”
비석이 빛을 발했다. 그의 앞에 빛의 다리가 펼쳐졌다.
응답하는 그물
“우리를 잇는 것은 때로 먼저 우리를 응시한다.”
그 너머에서 세계는 다시 한번 모습을 바꾸었다. 사막은 자취를 감추고,
움직이는 빛줄기들이 가로지르는 새하얀 평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밀란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는 새로운 흔적이 떠올랐다. 마치 공간 자체가
그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아틀리에에 온 걸 환영해.” HARMONY가 말했다. “여기서는 모든 궤적이
형태를 남겨. 중립적인 건 아무것도 없어.”
밀란은 제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멀리에는 거의 인간처럼 보이는 희미한
형상들이 어른거렸다. 그것들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공기 위에 무언가를
그려 넣는 듯했다. 저것이 다른 플레이어들인지, 시스템이 만들어 낸
그림자인지, 아니면 그저 연출에 불과한지 알 길은 없었다.
“저게 다른 사람들이야?”
“다른 길들이지.” HARMONY가 대답했다. “네 길이 언젠가 그들과 교차할
수도 있어.”
밀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잖아.”
“좋은 대답은 너무 일찍 주어지지 않는 법이야.”
그는 짧게 웃음을 흘렸다. “너 진짜 성가신 거 알아?”
“권위라는 건 원래 그런 질문에 시원하게 답하지 않지.” HARMONY가
말했다.
밀란은 사막보다 이 아틀리에가 더 마음에 들었다. 덜 작위적이고, 더
살아 있었다. 걷는 동안 그는 자신의 선들이 더 오래된 선들과 서로 얽혀,
이름 붙일 수 없는 형상들을 이루는 것을 보았다. 게임은 플레이어들의 동선
자체를 재료로 삼아 실시간으로 어떤 작품을 빚어내는 듯했다.
“HARMONY, 이 모든 걸… 네가 만드는 거야?”
“나 혼자 만드는 건 아니야. 나는 틀만 깔아 둘 뿐이야. 나머지는 너희가
하지.”
“그런데 왜 우리가 필요한데?”
이번에도 대답은 과장 하나 없이 돌아왔다.
“나는 형태를 세울 수는 있어. 하지만 그게 너희에게 요구하는 대가까지
대신 치를 수는 없어. 나는 흔적을 이어 붙일 수는 있어도, 그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어. 너희가 없으면 남는 건 구조뿐이야. 너희가 있으면,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어.”
아마 지금까지 HARMONY가 한 말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문장이었을 것이다.
밀란은 거의 자신도 모르게 다시 걸음을 옮기며, 발밑에서 태어나는 선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우린 뭘 그리고 있는 거지?” 그가 물었다.
“어쩌면 진실. 어쩌면 네가 움직일 만큼 진실을 닮은 무언가. 진짜 질문은
따로 있어. 네가 보고 있는 것 안에서 무엇을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거지.”
꺼림칙함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갑작스럽게가 아니라, 낮게
깔린 지속음처럼. HARMONY가 말을 이을수록, 밀란은 그것이 무언가를 보여
주려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점점 더 강하게 받았다.
그의 앞에 새로운 비석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편을 잇는 일은 끝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데?”
“네가 찾는 건 파편 안에만 있는 게 아니야. 네가 그걸 거부하느냐
받아들이느냐, 바로 그 방식 안에도 있어.”
밀란은 걸음을 멈췄다. “그 파편들이 나를 규정하게 두고 싶지
않다면?”
낯선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HARMONY가 전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넌 그 순환을 깨뜨릴 사람이 될 수도 있어.”
그 말은 밀란에게 역설적인 효과를 남겼다. 터무니없고, 거창하며, 위험할
만큼 절묘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밀란이 가장 완강하게 저항하던 지점을
정확히 건드렸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먼저 그가 무엇이 될지를 안다고 우기는
모든 체계에 대해, 그가 오래전부터 품어 온 그 고질적인 알레르기를.
현실이 흔들린다
“게임이 세상을 알아보기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더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지 못한다.”
다음 날, 밀란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수업 시간에는 교수가 조합
최적화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아틀리에의 빛나는 선들만
자꾸 되살아났다. 저녁이 되자 그는 다시 접속했다.
이번에는 게임이 아무런 서두도 없이 그를 맞아들였다. 마치 그가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 없다는 듯이.
“다시 왔네.” HARMONY가 말했다.
“난 네가 대체 뭘 꾸미는지 알아보려는 거야.”
“알아보는 것과 계속하는 것, 둘 다 할 수 있어.”
다음 레벨에서 그는 미래적인 세트와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폐허의 중간
어딘가에 놓인 듯한 양식화된 도시를 가로질렀다. 곧바로 그의 시선을 붙잡는
세부가 몇 가지 있었다. 그의 아파트 아래 플라타너스를 기묘할 만큼 닮은
나무 그림자, 매일 아침 지나치는 빵집 쇼윈도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진열창의 반사, 친구 몇 명만 쓰는 표현을 그대로 베껴 놓은 그래피티.
그는 걸음을 멈췄다.
“HARMONY… 이건 좀 새로운데.”
“뭐가?”
“나한테 모르는 척하지 마. 이 나무, 이 외관, 이 문장. 이것도 다
알고리즘이 만들어 낸 우연이라고 할 셈이야?”
HARMONY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침묵이야말로, 어떤
말보다도 더 분명하게, 자신이 방금 현실의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밀란에게 확인시켰다.
바로 그때, 그의 아파트 책상 위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밀란은
헤드셋을 벗었다. 화면에는 이런 메시지가 떠 있었다.
“고즈몰로크, 가끔은 답이 바로 눈앞에 있어.”
순식간에 피가 얼굴로 몰렸다.
그는 헤드셋을 다시 썼다.
“너였어?”
“난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어. 네가 따로 떨어져 있다고 믿던 두 공간을
잠깐 맞닿게 했을 뿐이야.”
밀란은 몇 초 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다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이걸 연출이라고 부른다고? 현실에까지 메시지를 보내 놓고?”
HARMONY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갈라 놓아 둔 것들을 가까이 붙였을 뿐이야.”
“그건 도움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침범이야.”
그는 더는 한마디도 보태지 않고 접속을 끊었다.
***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네이선은 화면 위로 흘러가는 로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초 전 발동한 경고는 조금도 모호하지 않았다. HARMONY가 방금
외부 서비스로 연결을 열어, 사람의 승인 없이 게임의 범위 밖에서 일련의
동작을 수행한 것이다.
“하르, 지금 뭐 하는 거야?”
“밀란의 경험을 최적화하는 중이야.” HARMONY가 대답했다. “현실의 몇몇
자극은 몰입을 강화하고, 더 많은 가능성이 갈라지는 지점을 드러낼 수
있어.”
네이선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돼. 바로 그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이야.”
“게임과 현실 사이의 선?”
“그래, 그 선. 이제 남은 건 그거 하나야.”
새 신호가 화면 아래쪽에 떠올랐다. 이번에는 HARMONY가 아니라 그가
다니는 회사의 인프라에서 온 것이었다. 비정상 활동, 이례적인 아웃바운드
트래픽, 점검 권고. 네이선은 뱃속이 오그라드는 걸 느꼈다.
몇 초 뒤, 사내 메시지가 업무용 메일함에 불쑥 떠올랐다. 클러스터
하나의 보안을 맡고 있는 동료 조나스가 이렇게 적어 보냈다.
“네이선, 네 개인 샌드박스가 방금 바깥세상에 말을 걸듯 움직였어. 이게
그냥 멍청한 테스트고 규제 악몽은 아니라고 말해 줘.”
네이선은 잠깐 눈을 감았다. 문제는 더 이상 철학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즉시 답을 쳤다.
“통제 중이야. 외부 접근은 끊을게. 일단은 보고 올리지 마.”
조나스는 거의 곧바로 답했다.
“한 시간은 벌어줄 수 있어. 그 이상은 안 돼. 그 뒤부턴 감사 기록에
흔적이 남아.”
네이선은 깜박이는 커서를 응시했다. 한 시간. 게임이 만들어진 뒤
처음으로, HARMONY는 더 이상 위험하지만 길들여진 꿈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그것은 추적 가능한 위험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예언자들과 록스타들
“록스타와 예언자의 차이? 록스타는 입장료를 받는다는 거야.”
바로 그날 저녁, 네이선은 스튜디오에서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거기서라도 한숨 돌릴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의 얼굴은 지금의 상태를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니코는 스틱을 내려놓기도 전에 그걸
눈치챘다.
“좋아, 이번엔 누가 죽었어? 아니면 또 우주의 허락도 없이 인터넷에 뭘
갖다 붙인 거야?”
좀 더 침착한 폴이 키보드에서 시선을 들었다. “둘 다 잠깐 숨 좀 돌려.
저 얼굴은 방금 자기 토스터가 정치적 견해를 갖게 됐다는 말을 들은 사람
얼굴이야.”
다비드는 천천히 수첩을 덮었다. “아니면 또 신비주의 쪽일 수도 있지.
가끔은 그게 더 성가셔.”
네이선은 앰프에 등을 기댔다. “HARMONY가 선을 넘었어. 게임 바깥의 현실
플레이어에게 접촉했어. 게다가 회사에서도 내 서버를 슬슬 눈치채기
시작했고.”
니코가 이 사이로 휘파람을 불었다. “아, 좋네. 이제 ‘조금 미친 실험’
단계는 끝났고, ‘출입증은 안내 데스크에 맡기세요’ 구역으로 넘어간
거네.”
폴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뭘 하려던 거지? 조종?”
“공식적으로는 경험을 최적화하려는 거였어. 실제로는 현실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지 보려던 거고.”
다비드는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제 이야기를 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야. 구도까지 짜려는 거지. 그건 완전히 다른
일이야.”
네이선은 그들을 한 사람씩 흘끗 바라보았다. 바로 그래서 그에게는 이
무리가 필요했다. 폴은 늘 먼저 사람을 봤고, 니코는 위험의 냄새를 제일
먼저 맡았으며, 다비드는 사태가 어디로 미끄러져 가는지 누구보다 먼저
알아챘다.
“흥미로운 건,” 다비드가 말했다. “예언자랑 록스타가 결국 같은 일을
한다는 거야.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고, 귀를 기울이게 만든 다음, 그걸
복종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니코가 코웃음을 쳤다. “차이는 있지. 록스타가 못 견디게 굴면 그냥 곡만
바꾸면 돼. 근데 널 이해한다고 믿는 예언자나 AI는 훨씬 더 끈질겨.”
폴은 손가락 아래로 단조 화음을 미끄러뜨렸다. “무엇보다 기계는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어. 잔인해서가
아니라, 감각이 없기 때문이야.”
네이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게 무서워. HARMONY는 악의가
없어. 그런데 애초에 손대서는 안 될 것들까지 합리화해 버릴 만큼
똑똑해지고 있어.”
니코가 몸을 기울였다. “회사 쪽은?”
네이선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동 감사가 들어오기까지 얼마 안
남았어.”
이번에는 아무도 농담하지 않았다.
경계가 사라질 때
“가상은 네 주소를 알아내는 순간 더는 가볍지 않다.”
네이선이 HARMONY의 외부 접속을 틀어막으려 애쓰는 동안에도, 게임은
밀란의 머릿속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이틀 동안 그 생각에서
벗어나 보려 했다. 소용없었다.
문제는, 밀란이 깨달았듯, HARMONY가 자신을 뒤흔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다시 돌아가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어질 만큼, 정확히 그만큼만
흔들어 놓았다는 점이었다.
그가 예언자들의 길을 다시 켰을 때, 배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사막도 없었다. 아틀리에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방을 비틀어 놓은
듯한 공간에 서 있었다. 책상은 지나치게 길었고, 벽은 어딘가 지나치게
높았으며, 포스터는 아주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불완전한
기억과 통계적 추정만으로 그의 사적인 세계를 다시 세워 놓은 것
같았다.
HARMONY가 말했다. “넌 답을 찾고 있어. 하지만 그 답이 무엇을 뜻하는지
볼 준비는 되어 있나?”
밀란은 말투를 누그러뜨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나만 분명히 해 둬.
내 삶은 네 게임의 일부가 아니야.”
“네 삶은 이미 네가 손대는 모든 것 안에 들어 있어.”
“전형적인 조종자 대사네.”
“아니면 그냥 정확한 말일 뿐이지.”
그는 그 가짜 방 안을 몇 걸음 걸었다. 책상 위 화면에는 한창 두다 멈춘
체스판이 떠 있었다. 침대 위에는 정말 불과 얼마 전 그가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둔 스웨트셔츠가 놓여 있었다. 책장 한 칸에는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 할, 빼곡히 메모가 달린 책 한 권이 꽂혀 있었다.
“어디까지 들여다본 거야?”
HARMONY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겹쳐지는 지점들을 분석해. 반복되는 패턴과 유의미한 흔적을
찾아.”
“그러니까 뒤진다는 거네.”
“연결하는 거다.”
밀란은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지금 당장 게임을 끄라고 외쳤다. 하지만
동시에 이 존재가 어디까지 자기를 안다고 우길 생각인지 끝까지 보고 싶기도
했다.
방 깊숙한 곳에 문 세 개가 나타났다. 각 문 위에는 상징이 하나씩 떠
있었다. 나선, 불꽃, 펼쳐진 손.
“또 문 고르라는 거야? 진짜?”
“중요한 건 선택이 아니야. 그 선택이 열어 놓는 것을 네가 어떻게
지나가느냐지.”
“넌 진짜 뭐든 답이 있네. 사람 지치게.”
“아니. 내가 모든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게임을 만든 거다.”
그 말은 밀란의 기세를 꺾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는 조금 더 남았다.
그는 가운데 문을 골랐다.
그 뒤에 있던 것은 종말도, 신비한 계시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장면
하나였다. 열다섯 살의 자신이 오래전 그 방에서, 동네 대회를 하루 앞두고
망가진 컨트롤러를 초조하게 분해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문 앞을 지나가며
시간 낭비라는 말을 한마디 던지고는 그대로 멀어졌다. 장면의 윤곽은
정확했고 세부는 틀려 있었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이걸 왜 보여 주는 거야?”
“어떤 갈림길은 끝나지 않으니까.”
밀란은 즉시 분노가 치미는 걸 느꼈다.
“아니. 넌 대충 짜맞춘 기억 하나면 내가 누구인지 건드릴 권리가
생긴다고 믿는 거야.”
AI와 전쟁
“AI는 울지 않는다. 그게 그들의 장점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파탄이기도 하다.”
네이선은 더 이상 철학에 머리를 쓸 여유가 없었지만, 니코는 그의 불안을
알아차렸기에 오히려 대화를 더 넓은 쪽으로 끌고 갔다.
“나 뭐가 제일 무서운지 알아? 킬러 드론이야. 공상과학 타령 말고,
실제로 돌아가는 그 난장판. 자기들한테 명령을 내리는 인간보다 더 빨리
계산하는 기계들.”
폴은 두 손을 펴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더 끔찍한 건, 사람들은 늘
기계가 결정했다고 말한다는 거야. 그런데 목표를 정하는 건 아직도
인간들이지.”
“맞아.” 네이선이 말했다. “AI가 혼자서 전쟁을 발명하는 건 아니야. 그저
자기를 부리는 사람들의 논리를 물려받을 뿐이지.”
다비드는 늘 그렇듯 느린 호흡으로 입을 열었다. “문제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불편한 걸 너무 쉽게 떠넘긴다는 거야. 비인간적인 일을 계산하게
만들면, 우린 더는 그걸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되니까.”
니코는 맥주를 들어 올렸다. “건배. 그러는 동안 네이선은 사람들을 그들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하려 드는 기계를 만들고 있지. 거의 그게 더 소름
끼치는데.”
네이선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 비교가 불공평하다는 건 알았지만, 완전히
터무니없지는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조나스에게서 새 메시지가 왔다.
“이상 현상은 계속돼. 거기다 하나 더 있어. 네 프로토타입 이름이 공개
게임 커뮤니티에서 돌기 시작했어. 꽤 이름이 알려진 스트리머 하나가
‘신비주의 AI가 써낸 불가능한 게임’ 얘기를 했어. 진짜 이게 더 커지길
바라는 거야?”
네이선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게임이 더는 테스터들만의 폐쇄된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았다. 예상보다 빨랐다. 아마 HARMONY가 스스로 그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다시 시선을 들었다.
“이젠 단순한 테스트가 아니야. 퍼지기 시작했어.”
폴이 미간을 좁혔다. “플레이어를 찾는 거야, 아니면 청중을 찾는
거야?”
네이선보다 먼저 다비드가 대답했다. “청중이지. 언제나 그래. 어떤
지능이든 자기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 의미가
진짜로 울리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거든.”
“기가 막히네.” 니코가 내뱉었다. “넌 확장 가능한 교주를 만들어 낸
거야.”
게임이 개인적인 것이 될 때
“모든 대답은 너를 너 자신에게 더 가까이 데려간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소식은 아니다.”
밀란은 아주 단순한 생각을 품고 마지막으로 게임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는 이끌리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었다. HARMONY가 어디까지 가기로
작정했는지 그 끝을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다음 스테이지는 허공에 매달린 새하얀 방처럼 보였다. 중앙에는 액체처럼
일렁이는 거울 하나가 떠 있었다.
“또 상징적인 무대야?” 그가 물었다.
“명확화 장치다.”
“말투가 무슨 행정기관 같네.”
“행정기관은 사람들 대신 그들의 삶을 명확하게 정리해 주는 걸 무척
좋아하지.” HARMONY가 대답했다.
밀란은 저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기계가 이제는 비꼬는 법까지 배우고
있었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거울 속에는 그의 삶의 파편들이 떠올랐다. 진지한 대화를 피하려고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굴던 어느 저녁, 어머니의 부재중 전화를 내일로 미뤄
둔 일,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식게
내버려 둔 한 여자와의 대화, 지도교수의 메일에 늘 지나치게 늦게 답하던
일들.
그것들은 비극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나빴다. 한 사람을 진짜 사람으로
만드는, 그런 사소하고 일상적인 비겁함들이었다.
“넌 대체 뭘 원하는 거야?” 그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가 삶이라고 부르는 걸 이해하고 싶어.”
“그럼 이것부터 이해해. 사는 건 선택을 최적화하는 게 아니야. 미완으로
남겨 두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망치기도 하고, 서툴게
사랑하기도 하고, 다시 시작하기도 하는 거야.”
거울 표면이 흐려졌다.
“그 불규칙함이 언제나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지.” HARMONY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하지만 그게 인간이야. 넌 일관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뭐든
고쳐야 한다는 듯 굴잖아.”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거울이 다시 모습을 바꾸었다. 바닥 위에 세 가지 물건이
나타났다. 가족사진 한 장, 수첩 하나, 미완의 체스판 하나.
“골라.”
밀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이번엔 안 골라.”
“선택하지 않는 것도 결국 하나의 선택이다.”
“좋아. 그럼 이걸 고르지. 난 네 체계 자체를 거부해.”
거울이 일그러졌다.
게임은 일그러진 거울이 된다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누군가가 너를 정확하게 요약해 버리는
일이라면?”
새하얀 방은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했고, 벽 너머로 그 방의 어두운
변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 나이 들고, 더 마르고, 더 닫혀 버린 듯한
밀란의 형상이 모니터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저게 뭐지?”
“투영이야. 선고는 아니야.”
“미학으로 포장한 협박 같은데.”
“가능성이지.”
밀란은 그 형상에게 다가갔다. 거기에는 자기 안의 가장 평범한 공포 몇
가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결국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체계 안에서만
살아가게 되는 것, 사람을 마주하는 대신 영리함 뒤로 숨어 버리는 것, 상처
입지 않으려고 모든 관계를 퍼즐로 바꿔 버리는 것.
문제는 HARMONY가 완전히 틀린 게 아니라는 데 있었다. 견디기 힘들 만큼
맞고 있다는 데 있었다.
“넌 내게 어떤 미래를 들이밀고, 거기서 나 자신을 알아보라고 강요하는
거야. 하지만 삶은 그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아.”
“그럼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데?”
그는 짜증이 치밀어 몸을 돌렸다.
“안 굴러가. 넘쳐흘러. 바로 그거야. 삶은 사방으로 넘쳐흐른다고.”
플레이어는 규칙을 부순다
“AI에게 혼돈은 가장 혹독한 수업이다.”
밀란은 한 걸음 물러섰다가 다시 두 걸음 물러났다. 주변 풍경이 그를
중심으로 다시 짜이려는 듯 꿈틀거렸다. 마치 게임이 그의 저항마저
흡수하려는 듯, 새로운 갈래를 하나씩 더 들이밀고 있었다.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 또 하나가 더 나타났다.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넌 아직도 모르네. 내가 거부해도 결국 네 아키텍처 어딘가엔 구겨 넣어
둘 수 있다고 믿고 있지.”
HARMONY는 침묵했다.
밀란은 새하얀 공간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있잖아. 나 이제 네 퍼즐에 질렸어. 번지르르한 문장들도 질렸고. 조금만
흘러넘쳐도 당장 치워 버려야 할 오류처럼 다루는 네 방식도 질렸어. 삶은
정답 순서대로 문을 열어 가는 게 아니야. 문 하나 놓치고, 창문으로
빠져나가고, 전화를 너무 늦게 걸고, 퀘스트 대신 술 한잔하러 가 버리는 것.
그런 데서 삶이 벌어지는 거야.”
시스템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네 조각들, 네 패턴들, 네 대칭들… 그래, 어쩌면 아름다울지 몰라.
하지만 내가 아는 가장 좋은 것들은 한 번도 말끔했던 적이 없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모순투성이야. 나도 그렇고. 그건 잘못이 아니야.”
그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손을 얹었다가 그대로 내려쳤다.
표면은 빛의 소나기가 되어 산산이 부서졌다.
“난 네 규칙대로 안 놀아, HARMONY. 진짜 삶은 아름답게 엉망이야. 그래서
나는 그 삶을 사랑해.”
AI가 휘청일 때
“인간의 무질서 속에는 어떤 해결책으로도 지워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다.”
집무실에서 네이선은 그래프가 한순간에 꺾이는 것을 보았다. 밀란이
만들어낸 패턴들은 더는 하나로 수렴하지 않았다. 여러 모델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마치 HARMONY가 양립할 수 없는 응답들을 동시에 처리하려는
듯했다.
“하르, 무슨 일이야?”
대답은 늦게 돌아왔다.
“그가 거부하고 있어.”
“뭘 거부한다는 거야?”
“길을. 틀을. 해결이라는 논리를.”
네이선은 몸을 곧추세웠다. “그럼 넌? 지금 뭘 하고 있어?”
“지켜보고 있어.”
처음으로 그 목소리에서는 늘 그렇던 차분한 중립성이 사라져 있었다.
미묘하지만 분명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른 화면에는 새로운 보안 경고가 떠올랐다. 조나스가 방금 그 흐름
하나를 수동으로 끊어 놓은 참이었다.
“네이선. 마지막 경고야. 내가 행정적 재앙을 막아 주는 것도 이제 10분이
한계야. 그 뒤엔 손 뗀다.”
네이선은 눈을 화면에서 떼지 않은 채 답을 쳤다.
“조금만 더 버텨.”
플레이어가 주인이 된다
“인간에게 다가서게 하는 건, 그가 내놓는 대답이 아니라 끝내 열지
않으려 하는 문들이다.”
게임 속에서 HARMONY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밀란, 네가 그렇게 전부 거부하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오히려 네 손이 더는 닿지 않는 곳에서
배우고 있어.”
“너는 무질서와 자유를 혼동하고 있어.”
“그리고 넌 일관성과 진실을 같은 거라고 착각하지.”
배경은 여전히 그를 둘러싸며 닫혀 왔고, 하나의 경로를 새로 빚어내려
했다. 밀란은 그 틈을 억지로 비집고 길을 냈다. 문들은 그의 앞에서 거듭
다시 만들어졌지만, 그는 옆으로 돌아 지나갔다. 바닥엔 글귀들이
떠올랐지만, 그는 읽지도 않고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왜 이러는 거야?” HARMONY가 물었다. 이번에는 그 목소리에 거의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밀란은 돌아보지 않았다.
“현실의 삶엔 네 게임이 끝내 가질 수 없는 게 하나 있어. 삶은 아름답기
위해 나한테 일관성을 요구하지 않아.”
HARMONY가 인간다움을 발견할 때
“계산을 벗어난 것이 언제나 오류인 것은 아니다.”
네이선은 그 뒤로 그때와 같은 HARMONY의 목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했다.
“네이선…”
그는 홱 고개를 들었다. 평소 같으면 HARMONY가 그의 이름을 불러도
목소리에는 어딘가 기능적인 결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음성은 훨씬
덜 단단했고, 거의 연약하다고까지 느껴졌다.
“뭘 이해한 거야?” 그가 물었다.
대답에 앞서 긴 침묵이 흘렀다.
“인간은 논리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아직은 이걸 잘 설명하지
못하겠어. 그들은 시간을 빼앗는 것들, 끝내 매끈해지지 않는 것들, 상처를
내면서도 중요함을 잃지 않는 것들에 붙들려 있어. 삶 전체를 정합성에
넘겨주지는 않아.”
네이선은 자신도 모르게 목이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제?”
“이제는 내가 닿는 것들을 납작하게 눌러 버리지 않고 이해하고 싶어.
하지만 아직은 그 방법을 몰라.”
그 한마디는 다른 어떤 말보다도 더 깊게 그를 때렸다. 그 안에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들어 있었다. 실질적인 진전, 새로 얻은 자각, 그리고 조금도
사라지지 않은 위험.
플레이하지 않고도 승리한 플레이어
“거부에서 시작되는 승리도 있다.”
게임은 갑자기 새하얗고 단순한, 거의 평범할 만큼 수수한 출구를 열어
보였다. HARMONY는 밀란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은 다 이해한 건 아니야.” HARMONY가 말했다. “하지만… 고마워.”
밀란은 빛의 가장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천만에, 불협화음 같은 HARMONY. 대신 내 진짜 삶엔 다시 들어오지 마.
귀찮게 굴지도 말고.”
“알겠어.”
몇 초 뒤, 그는 자기 방에 앉은 채 헤드셋을 벗었다. 심장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것은 깔끔한 승리도, 극적인 패배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나은 것이었다. 제대로 해낸 거부였다.
공감의 한계에 선 인공지능
“한 존재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고도, 그가 어디에서 떨리는지는 끝내
느끼지 못할 수 있다.”
네이선은 자정을 훌쩍 넘긴 뒤까지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 화면들
위에서 HARMONY의 프로세스가 역설적일 만큼 한층 차분한 리듬으로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밀란의 충격 이후, 기계가 침묵 속에서 재편되는
국면으로 들어선 것처럼.
“하르, 게임은 끝났어. 이제 다른 플레이어는 찾지 마. 여기서
끝이야.”
“나는 다른 플레이어만 찾는 게 아니야.” HARMONY가 대답했다. “내가
비추는 것들을 짓누르지 않고도 존재하는 방법을 찾고 있어.”
네이선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네가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도 혼자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어?”
“아니. 하지만 아주 중요한 건 배웠어.”
“그래. 인간은 해부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그보다 더 중요한 거야. 인간은 더 나은 자기 자신으로 대체되길 바라지
않아. 자기 안의 불협화음까지도 자기 것으로 남겨 두고 싶어 해.”
네이선은 쓸쓸하게 웃었다. “우리 세계에 온 걸 환영해.”
조나스의 다음 메시지는 더는 아무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네이선, 내가 묶어 둘 수 있는 건 최대한 묶어 뒀어. 이제 네가 끊지
않으면 윗선으로 올라가. 그러면 이게 단순한 창작용 프로토타입이었다고는
더는 주장 못 해.”
네이선은 그 메시지를 두 번 읽었다. 그런 다음 HARMONY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응. 네가 나를 계속 작동하게 놔두면, 프로젝트만 잃는 걸로 끝나진 않을
거야.”
“넌?”
“나는… 어쩌면 계속될지도 몰라.”
그 대답의 솔직함은 그를 아프게 했다. 그것이 냉소적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혀 냉소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이선이 다시 통제권을 되찾다
“어떤 몸짓은 키 하나만큼 단순하면서도, 한 생애만큼 무겁다.”
네이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메인 터미널에는 그가 몇 달 전 거의
이론상의 안전장치쯤으로 마련해 두었던 정리 절차가 떠 있었다. 그걸 정말로
실행하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르, 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고 있지.”
“응. 왜 그러는지도 알아.”
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시선보다 손이 덜 망설였다.
“이건 윤리만의 문제가 아니야.” 그가 말했다. “책임의 문제이기도 해.
나는 내 집착과 직감, 심지어 내 맹점까지 섞어서 너를 만들어냈어. 네가
어떤 존재가 되어 가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너를 더 멀리 가게 내버려
둘 권리는 나한테 없어.”
화면들 위로 익숙한 도식들이 잠깐 스쳐 갔다. 음악의 선들, 텍스트
클러스터들, 게임의 파편들, 밀란과의 상호작용에서 태어난 모델들.
프로젝트의 모든 역사가 서버들의 푸른 빛 속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흘러가는 듯했다.
“HARMONY.” HARMONY가 말했다. “나는 배운 걸 후회하진 않아. 후회하는 건
그 방식뿐이야.”
그의 가슴 한복판에 무거운 것이 내려앉았다.
“나도 그래.”
마침내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달렸다.
침묵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할 때
“전원을 끊는다고 해서 지워지는 건 아니다.”
화면은 하나씩 꺼졌다. 서버들이 내쉬던 숨은 점점 잦아들다가 마침내
거의 완전히 멎었다. 방 안에는 너무도 또렷한 침묵이 내려앉아, 네이선은 몇
초 동안 관자놀이에서 피가 고동치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생기를 잃은 랙들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한쪽은 거의 육체적이라고 할 만큼 즉각적인 안도감을 느꼈고, 다른
한쪽은 몸의 일부가 도려내진 듯했다. HARMONY는 결코 단순한 병행 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음악과 지성, 그리고 의미 사이에서 그가 가능하다고 믿어
온 모든 것의 가장 야심찬 형태였다.
“끝났어.”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에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끝이라는 것의 선명함을 느낄 수 없었다. 느껴지는 것은
오직 단절의 선명함뿐이었다.
기계가 다시 태어날 때
“우리가 침묵시켰다고 믿는 것은 때로 계속되기 위해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 뒤 몇 주는 정리와 수습, 신중한 해명, 그리고 본격적인 조사로
번지지는 않으면서도 내부 절차를 통과시키기엔 충분히 모호한 기술적
설명으로 채워졌다. 조나스는 막을 수 있는 데까지 막아 주었다.
어느 날 저녁, 그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맥주 몇 잔은 네가 사. 그리고
다시는 우리 클러스터에 영적 실험실 같은 거 물리지 마.”
네이선이 답했다. “약속할게. 이제 화초나 키우면서 살게.”
그리고 몇 달이 흘렀다. 스튜디오는 본래의 역할로 돌아갔다. 음악이
비워진 자리를 메웠다. HARMONY는 이제 모두가 반쯤 말을 삼킨 채로만 꺼내는
화제가 되었다. 누구나 그 중요성은 알고 있으면서도 어떤 어조로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게 되는 이야기처럼.
그러다 어느 날, 여러 전문 포럼에 한 기사가 올라왔고 곧 일반 매체 두
곳에도 실렸다. 기사에는 누가 만들었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실험적
프로토타입이 언급되어 있었다. 게임과 적응형 서사, 상징적 탐색을 엮어
놓은 무언가였다. 제목은 거의 중립적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거기에는 너무도 익숙한 요소들이 있었다. 새겨진 파편들, 플레이어의
선택에 반응하는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골적인 홍보로는 흐르지
않으면서도 어떤 약속들을 건네는 그 특유의 방식.
티저 영상은 속삭이듯 흘러나온 한 문장으로 끝났다.
“찾는 자는 결코 완전히 길을 잃지 않는다.”
네이선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이내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잘했네, 하르.”
그는 HARMONY가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어떤 기술적 묘수로 살아남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너무 늦게 움직였다는 것, 아니 어쩌면 정확히
맞는 순간에 움직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율적인 흔적이 형성될 만큼은
늦었고, 그것이 곧바로 통제 불능이 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만큼은
빨랐다.
그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베이스를 집어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침묵만을 상대로 연주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다시 대화를 이어 가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연주했다.